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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설 모음

도시의 크레바스

by 무체

그곳은 본래 가난한 사람들의 아지트였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등장하면서 거리가 예뻐지기 시작하자, 예쁜 것만 보면 환장하는 부자들이 서서히 도시를 장악해 갔다. 갈 곳 없이 내몰린 빈민층은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 그들은 거리의 폐휴지를 줍기도 하였고 패스트푸드점 구석에 모여 앉아 돈 벌 궁리를 했다. 부자들은 거리가 완전히 정화되기 전까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태세로 꼭꼭 숨어서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방인들은 그곳을 최적의 데이트 코스로만 여겼다. 이규원과 한귀중도 그들과 같은 입장으로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그렇게 이규원은 한귀중과 길을 걷던 중 난데없이 깊은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불행을 예고한 어떤 징조 같은 것은 없었다. 전날 기이한 꿈을 꾸었다거나, 아침에 괜한 불안함에 발길이 멈추어졌다거나 하는 따위의 예감 말이다. 그저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귀중과 규원은 오래전 소개팅을 한 사이였다. 만남에 시행착오가 많은 20대 초반이었던 만큼 그도 그냥 흐지부지 별것 아닌 것처럼 지나가는, 그렇게 잊어버린 남자였다. 아주 우연하게 둘은 결혼식에서 마주쳤고, 서로 어떤 악연으로 만나고 헤어졌는지는 까마득하게 잊은 채 낯선 장소에서 낯익은 얼굴끼리의 조우만으로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말았다. 이들은 다음 날을 기약했다. 가깝게 느껴진다기보다는 가볍고 무력한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과거에 규원은 귀중에게 차였다. 소개팅 후 규원은 잔뜩 들뜬 느낌을 안고 몇 번이나 귀중에게 문자를 보냈다. 규원을 소개해 준 친구가 저지하기 전까진 계속 그럴 태세였다. “그만 좀 치근덕대라. 귀중 씨가 너한테 관심이 없다잖니.”


그 후로 5년이 지났다. 규원은 그사이 조금 더 성숙해졌다. 귀중의 눈에 규원은 미약하지만 조금은 달라 보였다. 다소나마 자신의 색깔을 찾고 도드라진 매력을 갖게 된 관능적인 여자처럼 보였다. 여자가 스물일곱에서 여덟으로 향하는 나이는 가장 아름다울 때이다. 20대 초반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스물여덟처럼 보이는 스타일을 고수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화장, 헤어 및 의상 스타일은 조금 더 섹시했으면, 아름다웠으면, 매력 있어 보였으면 하는 ‘스물여덟 스타일’이다. 정작 스물여덟이 되었을 때는 그렇게 꾸미지 않아도 그보다 더한 매력이 묻어난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말이다. 규원은 그런 스물여덟이었다.


귀중은 침묵의 세계를 꿈꾸며 살았다. 여자들의 수다스러운 어색함에 혐오감을 느끼고, 그것이 동반하는 우매한 제스처들을 경멸했다. 오로지 자신의 기준에서 미학적이라 판단한 블루 셔츠만을 고집하며 살아왔다. 그의 기억력은 세상에 무관심한 편이었고 어투는 천진성을 유지했다. 지속되는 불운은 무디어진 지 오래고 부적절한 감상을 일삼았으며 습관적인 쾌락 같은 것에는 감탄할만한 집착을 보였으며, 윤기 없는 목소리로 ‘정상적인 고독함’을 추구하며 살았다. 그러나 형편없는 기억력에 비하여 추억의 편린은 잘도 회상해 내었다. 누군가가 묻는 말에는 압축적 답변으로만 일관하였고 대체로는 혼자 떠드는 재미로만 산 것이다.

도시 거리의 빈틈으로 하이힐이 떨어지는.jpg


일정 없던 귀중은 어느 날, 노천카페에 앉아 강아지처럼 뙤약볕을 쪼이고 있는 와중에 유독 꾸밈이 많은 말투를 쓰는 한 여자를 보고 말았다. 그녀의 입술은 일종의 날개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았다. 진공 같은 권태 속에 지내던 나날 중 그녀에 관해 가차 없는 탐색을 시작한다. 반면, 그녀의 음험해 보이는 애인은 오직 딴생각뿐이다. 둘의 관계는 머지않아 흔히 있는 결론처럼 끝나게 될 것이 눈에 선하다. 귀중은 그런 여자를 관찰하던 중 문득 그보다는 그럴듯하게 여겨진 규원이 떠올랐다.


오후가 되자 을씨년스러운 계절이 도래한 듯 갑자기 내리는 비에 깜짝 놀라 허둥지둥 피할 곳을 찾아서 들어갔다. 귀중은 가벼운 말과 몸짓으로 낯선 바리스타와 상황을 주고받으며 주문을 하였다. 커피를 기다리며 그제야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고, 남녀가 마주 앉아 떠드는 모습이 훈훈한 인상을 남기기도 하였다. 바리스타는 당당한 똥같이 생긴 쿠키 몇 점을 함께 내어주었다. 귀중은 커피를 들고 빈자리에 앉았다. 비는 생각보다 많이 내리지 않았다. 지레 겁먹은 자태가 멋쩍다. 저 정도는 맞고 다녀도 될 터인데 하면서 후회가 밀려오던 찰나 귀중에게 문자가 온 것이다. 가뜩이나 누구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왜 그런 날 있지 않은가. 쓸데없이 사람을 만나고 싶은 날. 때마침 규원은 용케도 찾아오겠다고 했다.


귀중은 카페 안에서 고성을 남발하며 바리스타에게 위치를 묻고 알려주며 작은 소란을 떨었다. 로맨틱한 대화를 나누던 손님들은 귀중의 소란을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바리스타는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니까 귀중은 가난한 동네의 어느 카페에 앉아 예전에 소개팅했던 여인 이규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 세상이 보였다. 규원은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날까? 그녀에게 전화해서 오지 말라고 할 걸 그랬나?


그러나 규원은 따뜻하고 친근한 여왕처럼 귀중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규원은 주문에도 규칙 따위가 있건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산만한 오더를 내렸다. 바리스타는 규원의 도도함 앞에 맥을 못 추는 모습이다. 그것이 가난한 청춘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강자의 계보를 잇던 규원은 유연한 몸짓으로 귀중의 앞에 앉았다. ‘오렌지 주스라.’ 묻고 싶었지만 귀찮았다. 건강을 생각하는 거겠지. 규원은 별안간 웬일이냐며 귀중의 연락을 묻는다.


“꽃가루 같은 소낙비 때문이죠. 뭐.”


카페 안에는 점점 더러운 인간들의 웅얼거림이 가속화되었다. 예쁜 여자들의 입에서 놀라운 욕설이 들리기도 했다. 그것들은 마치 낡은 조롱 같이 들렸다. 귀중은 후회했다. 내가 미쳤구나. 왜 그녀에게 만나자고 했을까. 규원의 이마에는 예상대로 허세가 반짝하며 빛나고 있었다. 본질은 변할 수 없는 거였다. 대체 어떤 몽상에 잠겨 있는 것일까? 재주 좋게 자신을 꾀어 보려는 것일 테지? 귀중은 규원을 비웃고 있었고 표면적으로 둘은 동시에 힘껏 웃었다.


“다 마셨으면 일어나 식사라도 할까요?” 규원이 자신의 오렌지 주스를 거의 다 비우고 물었다. “이 근처에 맛있는 파스타 집이 있던데.” “그리로 가시죠.” 규원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하이힐로 가볍게 바닥을 두드렸다.

목요일 오후, 가난한 동네의 작은 카페 앞에서 둘은 만났고 그곳에서 연인들이 필수로 찾아간다는 파스타 집을 향하여 걸어갔다. 그러나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잠깐 사이에 규원은 땅 밑으로 푹 꺼져버렸다.


규원은 갑자기 돌변한 운명에 분노가 치밀었다. 상황이 혼란스럽다는 사실보다도 억울함이 먼저였다. 제대로 대화 한 번 나누기도 전에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다니. 그녀는 다시 한번 절망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어서 빨리 깊은 수렁에서 구조되어 그저 하나의 해프닝으로 흘러가길 바랄 뿐이었다. 공중에서 발을 허우적거리며 떨어지는 기분을 이토록 오래도록 느끼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규원은 지구에서 오직 자기 하나뿐이라는 이상한 쾌감마저 느꼈다. 이토록 깊은 곳으로 떨어지면 사망은 물론이고 가루처럼 부서져서 존재라고는 흔적을 찾기도 어려울 거다. 그러나 어쩐지 그 일은 남의 일 같이만 여겨진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생긴 거란 말인가.


규원은 추락하면서 점점 더 생각이 많아졌다. 바닥은 예상보다 훨씬 깊고 멀리 있는 듯했다. 극한의 공포를 느끼며 절규하였지만, 지루함도 한몫했다고 본다. 도대체 얼마나 깊기에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도 이토록 지겨울 수가 있단 말인가. 제발 이쯤에서 바닥에 닿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또 바랐다. 이러다가 정말 지구의 반대편에 도달하려는 건 아닌지. 규원은 지쳐갔다. 이건 꿈이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꿈. 제발 멈췄으면 좋겠다. 바닥에 닿고 싶다고. 규원은 찬찬히 떨어진 경로를 회상했다. 그렇게 백 번을 더 회상해도 바닥을 딛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한 염려를 하면서 말이다.


카페를 나온 규원은 귀중과 수줍게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었다. 어떤 길을 걷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12cm 높이의 하이힐을 신고서 울퉁불퉁한 도로를 걷는 일이 규원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한눈을 팔고 걷는다 해도 균형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걸으면서 귀중의 얼굴을 바라보고 블록 사이의 홈에 조금 힘겹게 굽이 끼는 일이 있다 하여도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는 노련함이 있었다. 규원은 결혼식장에서 귀중을 우연히 만난 후 제 딴에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데이트를 시작하는 거였다. 그날 이후 집으로 돌아가면서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과 귀중에 대한 알 수 없는 괘씸함과 배신감이 혼미할 정도로 전신을 휘감았지만, 예전 같지 않은 귀중의 빠른 답장 덕분에 순식간에 씻은 듯 잊을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귀중이 진심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때문에 규원은 곧바로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귀중에게 관대해졌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이상형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자신을 찼던 귀중이 규원의 가벼운 문자 메시지에 불쑥 전화를 걸어와 당장 만나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세월은 흐르고 볼 일이라며 규원은 좋아했었다.


카페를 나서며 걷던 도로 옆에는 한창 공사 중인 건물이 있었다. 당시 굴착기가 연신 바닥을 흉한 소리를 내며 뚫고 있었고 조금의 파편이 튀는 것을 어쩌지 못해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던 공사 인부들의 모습을 스쳐 왔었다. 귀중은 친절하게도 규원이 다칠까 팔로 규원을 감싸는 시늉을 하면서 걸었고, 규원은 귀중의 자상한 그 모습에 감탄했을 뿐이다. 그리고 5미터쯤 걸었을까? 규원은 귀중의 시시껄렁한 말에 과도하게 고개를 젖히며 웃는 순간 사라진 거다.


규원은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반복하여 추리를 해보았다. 굴착기의 파열음이 어딘가에 균열을 만들었나 보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껏이지 어떻게 이렇게 깊이 파괴될 수 있단 말인가. 혹시 그동안 빙하기에 숨어 있던 크레바스가 갑자기 도시 한가운데 실체를 드러내었단 말인가? 겨우 이깟 걸로? 그러나 으레 위대한 발견의 동기는 하찮은 법 아닌가? 뒷산에 죽은 개를 묻으러 땅을 파다가 산적한 보물이 나올 수도 있는 것처럼. 중고상에서 산 밥그릇이 조선 시대 분청자기가 될 수도 있고. 하지만 수만 년 동안 꼭꼭 자취를 감추며 숨어 지내다가 하찮은 기계의 쑤셔 박질 하는 소리에 그것도 대도시인 서울 한복판에? 정말 말도 안 된다. 도시에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다.


그러나 사실이 정말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실종자는 모두 이런 틈에 떨어진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이 바닥에 닿게 된다면, 그래서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다면 그때는 세상의 길을 잃은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건가? 그러나 규원은 찾을 사람도, 찾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나락으로 떨어진 마당에 무슨 놈의 새로운 대인관계가 필요하단 말인가. 누군가를 새롭게 사귀고 정착하고 적응하는 일을 생각하면 벌써 피곤이 몰려올 정도다.


의지가 통했던지 다행히 누군가 규원의 곁에 바싹 붙었다. 그리고 그는 규원에게 정보를 알려 주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막 도달했군요. 도시의 크레바스에 빠져서.” 그는 재빠르게 말을 마치자마자 의지와 무관하게 어딘가로 떠돌기 시작했다. 그의 외침이 몽롱하게 들렸다. “도시에는 거대한 크레바스가 있어요. 나는 처음에는......."


더는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갔다. 도시의 크레바스에 빠지면 이토록 무질서의 형태로 영원히 떠돌아다녀야 하는 운명에 처한단 말인가? 오직 관념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끝도 없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규원은 절망을 생각해 본다. 그러나 절망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이힐이 필요 없는 공간에 홀로 떠돌아다니는 일이 절망인가? 누군가 함께 하는 삶이 행복한 거라고 누가 규정지었던가.

세상은, 어쩌면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은 허구일지도 모른다. 절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있을 수도 없는 환상의 세계. 세상은 처음부터 이런 분자처럼 살게 조직된 것을 이제야 깨달았는지도. 그렇다면 이곳은 더는 크레바스 속 세상이 아닌 거다. 이것은 현실이고 실제의 삶이다. 아무도 만난 적이 없고 이름 없는 분자로 사는 세상. 어디선가 마치 주기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떠 있는 것이 운명인 양. 마치 균열 사이를 오가는 유령처럼, 좀 전의 그가 다시 다가와 말을 이어간다.


“나는 처음에는 크레바스를 피해 갔지만, 나중에는 크레바스를 찾아 이곳에 오게 되었어요. 나는 이곳이 좋아요. 아무것도 없는 이곳이 곧 익숙해질 거요.”


귀중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본다. 물론 그녀를 알만한,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되는 번호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규원이는요. 5년 전에 사라졌어요. 가족들이 실종 신고를 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에요. 그렇다고 귀중 씨가 책임을 느낄 필요는 없어요. 그냥 우연한, 아니 공교롭게도 시기가 그랬던 거예요. 세상에 누가 소개팅 한 번에 사랑에 빠지고 차였다고 세상을 등지나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요. 혹시 그것 때문에 일말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이러는 거라면 접으라고 말하고 싶네요. 그런 건 결코 아니니까요. 규원이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난데없이 규원이를 만났다고 하니 저로서는 황당할 수밖에요. 분명히 말하지만 규원이는 5년 전에 사라졌어요. 갑자기 땅 밑으로 꺼지듯이 말이죠.”


전화 너머의 음성은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귀중의 모든 감각은 시각에 집중되어 있었다. 방금 눈앞에서 누군가가 땅 밑으로 꺼져내리는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화를 팽개치고 규원이 사라진 균열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갔다. 주위를 조금 다른 각도로 집중해서 보니 사람들이 점점이 불시에 밑으로 사라지고 있는 게 보였다.


도시의 크레바스. 이렇게 곳곳에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귀중은 무턱대고 그들이 뛰어내린 곳을 향해 따라갔다. 비로소 그가 갈구해 왔던 심연을 찾아낸 것 같았다. 귀중은 그 균열 속으로 망설임 없이 몸을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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