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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체 May 10. 2024

브라질표 아버지

  버스에서 내리니 경사면 각도가 비슷한 알록달록한 집들과 시선이 머무르기 좋은 자동차들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띈 자동차가 보였고 그 차의 주인이 아버지란 것도 알 수 있었다. 언젠가 페이스북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넙데데한 얼굴형에 이마가 훤하게 벗겨진 단발머리는 사진 속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아버지에게 다가가자 아버지는 익숙한 듯, 그러면서 자못 피곤한 눈빛으로 나를 안아 주었다. 아버지는 나더러 사진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덩치가 크다며 잘 컸구나,라고 하더니 엄마를 많이 닮았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내 모습에서 간신히 엄마를 기억해 내려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이어서 트렁크에 내 짐을 실으며 말했다.


  "가는 길에 명소 좀 둘러보고 가자꾸나."


   나는 구경보다 쉬고 싶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핑크 비틀은 처음 봐요."가 내가 아버지 앞에 꺼낸 첫마디이다.


아버지는, 올드카를 구입해 직접 도색하였다고 웃으며 말하더니 여기는 폭스바겐이면 된다,라고 말했다.


 삼십 년 만에 처음 만난 아버지와 나눌 대화의 유형은 따로 있을 것 같았지만 어색함이 아무 말 대잔치를 이루었고.

 아버지는 전직 택시 운전사답게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브라질에 온 지도 오 년이 넘어간다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나를 손님이라고 여긴 걸까.



 우리는 어색한 침묵을 유지했고 아버지도 딱히 내게 말을 걸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창밖으로 마을이 보였다. 도로 전면으로 독일식 주택이 정연해 보였다. 얼마쯤 가다가 아버지는 카넬라 폭포를 가리켰다. 이과수 폭포에 비하면 저것은 애기 폭포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폭포 근처에 차를 세웠다. 아버지를 찾는 손님들에게 그랬듯 내게도 일종의 습관화된 의례처럼 그곳에 데려가려는 것 같았다.



 폭포는 커다란 동물이 포효하듯 우렁찼고 웅장했다. 안개처럼 희뿌연 습기가 잔재처럼 날렸고 하얗게 폭발하듯 터져 나온 물줄기는 위협하듯 압도적이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러운 폭포의 광기를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손짓을 하였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물의 소리를 빠져나왔다. 짙푸른 나뭇잎들을 스쳐 걸으며 질퍽한 흙의 낯선 질감에 깜짝깜짝 놀랐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다를 바 없는 공기와 흙일 텐데 덜컥 겁이 났다. 오솔오솔한 숲길을 거의 벗어났을 때 즈음 아버지에게 이과수 폭포에 관해 물었다.


“이과수 폭포도 구경하고 싶으냐?”

“그런 것도 있고... 그곳에 가보고 싶었어요.”

“폭포를 구경하러 가는 건 좋지만, 흑인도 많고 치안이 안 좋아서 지내기엔 위험하다. 총기 사고도 많고... 여기서 차로 스무 시간은 넘어가야 할 거다.”


어디든 직접 가보지 않은 곳은 부정적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이곳에 살지 않았으면 나는 리우데자네이루를 여행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갑자기 생각난 듯 내게 왜 SNS 같은 것을 안 하고 지내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싸이월드에서 이사한 이후 카카오 스토리에도 둥지를 틀었다가 트위터에서 지내더니 최근에는 페이스 북으로 이동 중인 것 같았다. 그곳에 아버지의 모든 일상이 들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카카오 스토리까지 왕래를 하다 그마저도 그만둔 상태다. 점점 보여 줄 것도 보고 싶은 흥미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동생의 계정으로 아버지의 삶을 눈팅한 적은 있다. 아버지는 그곳에 그리움의 이모티콘을 가득 붙이고 있었다. 아버지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그리워하는지는 모호했다. 모호함은 때로 연민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나도 한 때는 그런 적이 있었다. 연령대와 상관없이 누구나 한 때는 그런 시기가 있는 것처럼.


 

벌써 오래전의 일이 되어버렸지만, 전 국민의 화해 모드로 붐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관계의 억지스러움이 시작된 최초의 세계. 바로 싸이월드가 번성할 즈음이었을 거다. 모두들 그곳에 가서 일촌을 맺고 관계를 들추고 찾아다니며 곰살맞게 굴던 시절, 나는 그곳에서 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때 아버지와 나는 BGM이나 스킨 등을 주고받으며 부녀지간의 관계를 공고히 맺곤 했었다. 얼마못가  그곳이 적나라한 현실의 기록일 뿐이란 걸 인지한 순간 사람들은 찜찜함을 감추기 위해 피난 가듯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각자의 숨을 자리를 발견했다면서 또 다른 세계를 찾아다녔다. 숨고 찾는 일의 반복은 끝이 없을 인간의 유희 었으니까.


 

 아버지는 내게 배가 고프냐고 물었다. 그렇진 않다고 했더니 초콜릿 카페를 가리키며 뜨거운 우유에 초콜릿을 퐁당 담가 먹는 서브마리노 한 잔 마시고 들어가자고 하였다.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다시 서먹한 정적이 흘렀다.


"그동안 왜 한 번도 오지 않았니. 이렇게 보니 좋은 것을."


곁에 나란히 선 아버지는 나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거리를 거닐며 쭉쭉 빵빵한 남미의 미녀들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질 만큼 이곳 생활이 태연해진 아버지는 아무리 봐도 낯선 아저씨 같았다. 갑자기 목울대가 잠기기 시작했다. 나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아버지는 서브마리노를 마시고 있는 나를 연신 카메라에 담았다. 내게 연아! 어떠냐? 맛이 좋지? 라며 되물었다. 그러더니 브라질에 대한 극찬으로 이어졌다. 아버지는 브라질의 넓은 땅과 다양한 문화를 찬미하였다. 특히 이곳은 맑은 날은 말할 것도 없지만 흐린 날은 흐린 대로 이쁜 곳이라고 했다. 이곳이야 말로 천국이 따로 없다고. 나는 그라마두가요? 아님 브라질이요?라고 물었다.


“브라질이지. 근데 준이는 취업 준비하느라 못 왔다고?”

“취업이 아니라 창업이요. 괜찮은 아이템이 있대요. 투자자만 확보하면 좋을 것 같다고요.”

“열심히들 사는구나. 쉽지는 않을 테지.”


아버지의 허허롭게 웃는 모습이 동생과 조금 비슷해 보였다. 창밖으로 작은 꼬마가 뛰어다녔다. 꼬마의 이마를 타고 내리는 땀방울이 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그만 일어나자고 하였다.


  아버지는 핑크 비틀을 향해 걸어갔다. 아무리 봐도 아버지의 핑크 비틀은 그곳 싸이월드에서 유일하게 건져 온 아이템처럼 보였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서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곳. 내 미니미는 지금쯤 빈방에서 홀로 웅크리며 앉아 있겠지. 대체로 맑음이란 기분을 표시하고.


 

아버지는 내가 건넨 메모를 보더니 아버지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라고 말했다.


“원하면 우리 집에서 묵어도 상관은 없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간다고 했을 때부터 묵을 곳을 묻던 분이 아니던가. 아버지는 시동을 켜며 머무는 동안 자주 만나자고 하였다. 보여줄게 많다고.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버지가 나를 내려놓고 간 집 앞에는 화려한 문양의 홈드레스를 입은 뚱뚱한 노파가 홀로 있었다. 노파는 엉거주춤하게 걸으며 내가 묵을 방을 안내하였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찾아 오브리 가다(Obrigada),라고 말했다. 노파가 밝게 웃으며 내려갔다. 옷을 갈아입고 난 후 조금 있으려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베크롬비의 모델처럼 상의를 벗은 채 황금빛 피부를 드러낸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서툰 영어에 환한 미소를 장착하고 내 앞에 나타났다.


“알마?”


모델 에이전트에 근무하면서 유일하게 건진 거라곤 전 세계에 머무를 곳을 확보해 둔 점이다.  브라질은 간혹 조합 실패로 인한 기괴한 혼혈인이 평균을 깎아 먹기도 하지만 우월한 유전자의 미인들이 많아 모델이란 직업의 접근성이 높은 편이다. 이곳의 젊은 미인들은 할 일 없으면 모델이나 할까, 란 말을 상투적으로 사용할 이유가 충분한 곳이었다.


캐스팅 디렉터로 일했을 때, 광고 시즌이 다가오면 촬영장에서 통역 일을 대신할 때가 있었다. 에이전트는 모델들이 머물 곳은 물론 사생활 및 취향마저 존중해 신선함을 유지시켜야 하는 책무가 있다. 타국에서 따끈하게 배달된 모델의 컨디션에 신경 쓰느라 밀착하여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는 의미다. 밀레나는 퇴사를 몇 주 앞두고 만난 브라질산 모델이다. 그녀는 광고주의 실물 미팅 때마다 퇴짜를 자주 맞아서 주눅이 든 상태였다. 견종의 혈통을 따지듯 외국 모델들의 태생이 퀄리티를 좌우한다고 믿으면서도 밀레나의 태생은 소용이 없어 보였다. 에이전트에서 아무리 지젤 번천의 고향 리우데자네이 태생이라고 강조해도 광고주들은 러시안 모델 같다고 탐탁지 않게 여겼다.


 러시아 출신 모델은, 동구권 출신 포르노 배우들의 무리한 활약 탓인지, 퀄리티 떨어지는 모델들의 무분별한 작업으로 인한 이미지 손실로 인해 통으로 비선호가 되어 버렸다. 때문에 나탈리아 보디아노바처럼 탁월하지 않은 이상 눈 높은 광고주들 선호하는 유형이 아니었다. 소위 B급으로 분류되었다. 더군다나 밀레나는 타국에서의 문란한 자기 관리 탓에 하루가 다르게 늙어갔다. 나이도 꽉 찬 스물둘이라 여러모로 불리했다. 한국 나이로 스물이라 하여도 그보다 어린 모델들이 전성기를 뽐내고 있기 때문에 눈 밑의 다크 서클은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도 열세 살 무렵에는 자신이 지젤 번천이나 알렉산드라 엠브리시오처럼 되리라 확신했을 테지.




  밀레나는 짙은 화장을 지우고 주근깨를 드러낸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을 끝낸 상태였다. 헤어 아티스트의 손길로 고유의 금발 머리에 약간 볼륨을 주었더니 훨씬 멋져 보였다. 그럼에도 어디서 뭘 하고 다녔는지 고급스러움을 망각한 포즈 일색이었다. 지켜보다 못한 나는 포토그래퍼와 상의 후 그녀에게 요청하였다. 제발 어떤 포즈도 취하지 말아 달라고. 차라리 무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게 그나마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밀레나는 어색한 포즈를 빼고 남미 특유의 쾌활함만 회복한다면 아직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의욕을 복 돋아 주고 촬영 중 틈틈이 브라질 여행 계획을 얘기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면도 있었다. 역시 촬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밀레나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는 페이스 북을 통해 수소문한 끝에 그라마두의 주소와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물론 원하면 그곳에 얼마든지 머물 수 있다고 했다.


 


알마는 그러니까 밀레나의 친구의 친구다. 일본계 혈통이라는 데 그는 부모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좀 전에 본 노파손에 키워진 듯하다. 알마는 낮에는 항상 웃통을 벗고 지내는 스무 살의 풋내기 모델 지망생이다. 여자와 다르게 남자는 한창 전성기를 달릴 수 있는 나이라 그런지 매사 의욕이 넘쳐 보였다. 알마는 혼혈의 강점만 부각한 좋은 체형이긴 하나 얼굴이 지극히 평범했다. 못생겨도 강렬한 인상이 유행인 추이로 보자면 모델로 성공확률 20% 미만 예상이다. 그건 그렇고 실질적으로 내가 이곳에서 묵을 수 있게 해 준 숨은 공로자는 알마의 애인이자 밀레나의 친구 나타샤다. 밀레나와 둘 사이 관계의 기원은 알 수 없다. 둘이서 인스타그램 혹은 해외를 떠돌며 사귀게 되었겠지,라고 추측할 뿐이다. 밀레나와 같이 나타샤도 초저녁의 지는 해에 속했다. 물론 나이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스무 살이 되도록 나타샤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몸에 새겨진 타투는 해적선 선장처럼 많았다. 무엇보다 나타샤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실 그녀의 고향이 어딘지도 모르겠다







알이 꽉 찬 밤송이가 된 것처럼 핑크 비틀은 터질 것 같이 좁게 느껴졌다. 낯선 세 사람의 공기가 나의 폐를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에어컨 대신 창문을 열고 싶다고 말했다.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의 아내 사야코와 알마랑 함께 카로콜 폭포를 구경하고 오는 길이었다. 처음에는 나타샤도 함께 갈 예정이었으나 출발 전에 싸웠다며 알마 혼자 나타났다. 덕분인 건지 우린 좁은 차에 한 차로 움직였다. 먼 거리의 여정은 아니었지만 종일 비가 내리고 나는 감기 기운마저 있어 여러모로 최악인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열심히 운전과 전화통화 그리고 관광 안내에 집중하였다.


  브라질에서 아버지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방랑객으로 최적화된 숭굴숭굴한 성격 탓인지 특정 직업이 없어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바쁜 일상을 보내는 모양이다. 가는 내내 어디선가 쉴 새 없이 전화가 왔고 한국어, 일본어 등 다양한 언어를 섞어 말했다.


 

카로콜 폭포라고 카넬라 폭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낙폭차가 조금 났다는 것 이외는 내게는 똑같은 폭포였다. 중국의 절을 동서남북으로 구경하고 다녀도 거기서 거기인 것 같던 것처럼 같은 느낌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하였다. 알마는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좋다고 하였다. 나도 얼떨결에 네,라고 대답하였다.


비 온 뒤라 그런지 신발 바닥에 흙이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충분히 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잿빛 흙이 묻은 내 신발을 보더니 좀 더 털어야겠다고 말했다. 매트에 발을 문지르고 점프를 해도 좀처럼 흙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됐다,라고 하였다. 그 모습을 본 사야코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들어갔다. 아버지는 사야코의 뒷모습을 보며 말하였다. 일본에서 지낼 때 그녀를 만났다고 했다. 그전에도 전 세계의 숱한 여자를 만나왔다고 자랑처럼 얘기했다. 아버지는 사업 수완은 좋지 못해도 여자를 꾀어내는 수단은 좋았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사야코와 함께 지낸다는 사실은 싸이 월드 때부터 알고 있었다. 미니 홈피의 사진으로도 여러 번 봤었다. 둘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만난 사이 인지는 모르지만 브라질로 이주한 뒤부터 정식으로 결혼을 했다고 말했다.


  "착한 여자다."


사야코는 친척이 하는 식당에서 카운터 일을 보고 있다고 하였다. 사야코가 일본에 있을 때는 스키 용품점을 운영했다며. 아버지는 그에 대해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듯 보였지만 나는 궁금함을 드러내지 않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에겐 둘만의 애틋한 사정이나 추억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나는 부엌에서 서둘러 음식 준비를 하는 사야코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아버지가 착한 여자라고 말했다. 착한 여자라고.



 사야코는 아버지와의 결혼이 처음이라고 했다. 나이는 오십 대 중반정도로 보였다. 염색하지 않은 검은 커트 머리를 하였고 마르고 핏기 없는 얼굴에 까만 점들이 어떤 별자리처럼 박혀 있었다. 둘 사이에 자식이 없는 것에 대한 적적함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야코는 태어난 순간부터 적적한 모습이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야코의 적적함은 아버지를 곁에 둠으로 메워졌던 걸까. 엄마의 활달하고 화려한 모습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사야코가 뒤를 돌아보더니 살짝 웃었다. 나는 사야코에게 도와줄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손을 크게 저으며 괜찮다고 편히 쉬고 있으라고 하였다. 그 말은 마치 자신을 방해하지 말라는 소리로 들렸다.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는 이 층에 올라가 구경해도 좋다고 하였다. 올 때마다 성급하게 가지 않았니,라고 말하면서. 나는 알마와 함께 이 층으로 올라갔다. 알마는 남의 집 인테리어 따위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창밖으로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며 좋아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알마가 곁에 있어서 안심이 되었는지 나는 이전보다 여유 있게 집안을 둘러보았다. 가구 배치 등 빈틈없이 완벽하게 정리된 모양새가 사는 이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했다. 집은 둘이 살기에 충분히 넓고, 오히려 넘치도록 멋져 보였다.



엄마는 아버지가 타국에서 고생하는데 속을 썩이면 되겠느냐며 우리를 혼내곤 했었다. 그 말이 오랫동안 가슴에 박혀 있었는데 아버지는 이 먼 땅에 와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자 묘한 배신감이 들었다.


“집이 어떠냐. 마음에 드냐?”


어느새 뒤 따라 올라온 아버지가 물었다. 나는 대답대신 짧게 웃었다. 아버지는 알마가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려고 하는 물건을 두어 번 다른 곳으로 두었다. 알마더러 참으로 산만한 청년이라고 아들 대하듯 꾸짖는 어투로 말했다. 알마는 머리를 긁적이며 히죽거렸다. 아버지는 알마에게 몇 번이나 만지는 것은 안 되고 보는 것만 허용한다고 말했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브라질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동생 때문이었다. 동생은 구태여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최소한의 도움이라도 받으면 좋지 않겠나 싶었다. 브라질에 도착한 첫날부터 내내 마음에 걸렸던 그 말을 아직도 못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매사가 태연했고 내게 조금의 틈도 비추질 않았다. 아버지는 내게 친절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란 이름이 낯설듯 아버지도 딸인 내가 낯설었으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엄마와 이모 그리고 큰 아버지에게 숱하게 들으며 살았다. 아버지는 70년대 후반 사업 실패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해외로 도피한 후 한국 땅을 한 번도 밟지 못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한국을 떠나던 무렵 내 나이 겨우 두 살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이혼을 한 것도 아닌 이상한 상황 탓인지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갈증은 적었다. 언젠가는 볼 수 있겠지. 아버지가 도망간 것도 아니었으니. 한국에 있는 우리 가족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홀로 이란성쌍둥이 남매를 키운 엄마는 이모와 함께 속초에서 술집을 영했다. 엄마는 딸 자랑하는 맛으로 삶을 버틴 분이었다. 엄마는 좋다고 하는 것은 닥치는 대로 사 모으며 사치를 즐겼다. 내게도 예쁜 것으로만 꾸며주려고 했다. 어릴 적 나를 둘러싼 모든 물건은 핑크빛 일색이었다. 엄마는 당시에 흔치 않던 외제차를 몰며 내게 공연한 허영을 심어 주기도 했다. 그런 엄마가 부끄러웠지만 엄마가 주는 혜택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엄마가 아버지를 그리워했는지는 모르겠다. 겨우 2년 살고 헤어진 사이니까.


1997년 엄마는 돌연 숨을 거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눈덩이처럼 쌓인 채무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게라고 이모가 말했다. 집에 빚이 그렇게 많은 줄도 모르고 살았다. 손을 벌릴 수 있는 곳은 다 찾아다녔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아버지는 학비를 내주겠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생각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낯선 핏줄이었으니까.


계단을 내려가며 아버지는 내게 알마 흉을 보았다. 번죽이 좋다고.


“밥은 지네 집에 가서 먹지. 구태여 따라 들어왔을까.”


아무래도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는 일은 무리일 듯싶었다.


 

스멀스멀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음식을 가져오면서 사야코는 강박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접시를 몇 번이나 고쳐 옮기며 배치에 신경을 썼다. 음식을 다 내어왔는지 그제야 수줍어하면서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오코노미야끼를 가리키며 사야코가 가장 잘 만드는 음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한식을 싫어한다며 당신 입맛에는 일본 음식이 더 잘 맞는다고 하였다. 때때로 아버지는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싫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옥수수 가루를 묻혀 만든 음식을 가리키며 브라질 전통 음식 파러파라고 했다. 여행지에서 먹던 꼬치 음식 같은 것도 나왔는데 일본식 퓨전 요리 같아 보였다. 아버지는 그것도 당신이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좋아했다. 사야코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만들어 보았다고 하였다. 부녀지간이니 입맛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서라고 덧붙였다. 나는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하였다. 꼬치를 한 입 떼어먹고 오코노미야끼도 조금 덜어 먹어 보았다. 맛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맛이 났다. 이국에서 먹는 제 나라 음식이니 그럴 법도 하겠다 싶었다. 아버지는 파러파를 덜어서 내 앞에 건넸다. 파러파는 아까부터 코끝을 자극했던 달콤한 향의 주범이었다. 건포도, 바나나, 삶은 달걀 등이 옥수수 가루와 함께 뒤섞여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아버지는 옆의 꼬치 음식으로 나온 양고기나 소시지 등에 묻혀 먹어도 맛있을 거라고 말했다. 음식 사진을 여러 장 찍더니 나의 먹는 모습을 담겠다고 맛보라며 보챘다. 나는 파러파를 접시에 덜었다. 한점 집어 입에 넣으려는데 갈색의 점들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개미떼들이 득시글했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순간 구역질이 올라왔다. 위기를 모면할 생각에 급하게 꼬치 요리를 집어서 양고기를 한 점 먹었다. 양고기를 씹으며 눈가가 붉게 충혈되는 것을 느꼈다.  헛구역질을 억지로 참으며 양고기를 간신히 삼켰다. 양고기의 누린 맛을 불평할 상황이 아니었다.


  “얼른 파러파 좀 먹어 보아라. 사야코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요리다. 달짝지근하고 감칠맛 나는 게 아주 일품이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꼼짝하지 않았다.


“아니, 왜 못 먹고 그러냐.”


 아버지는 곁에서 폰을 들이대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음식을 입에 넣는 장면을 찍겠다는 의지가 강해 보였다. 아버지는 폰 속의 뷰파인더로 나를 보며 말했다.


 "자 찍는다. 어서 먹어라."


 나는 용기를 내어 숟가락을 집었다. 꼬물거리는 개미는 여전히 득시글 거렸다. 나는 남들보다 비위가 약한 체질이다. 그러나 비위와 상관없이 음식 위에 개미떼를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먹을 사람이 몇이나 있으려나.


엄마는 나더러 지 아빠를 닮아서 고집세고 예민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며 피곤한 한탄을 하곤 했다.

  사야코도 아버지의 성미를 모르는 것 같지 않았다. 알마가 우리 눈치를 보더니 파러파를 덜어 맛을 보았다. 나는 알마를 쳐다보았다. 알마는 금세 표정이 밝아지면서 맛있다고 하였다.


“그렇지? 맛있다니까.”


알마의 먹는 모습과 아버지의 재촉에 참다못한 나는 잔뜩 빨개진 얼굴로 여기 개미가 있어요,라고 말했다. 알마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사야코는 나처럼 얼굴이 빨개지며 내 앞의 접시를 서둘러 가져가 살펴보았다. 아버지도 그럴 리가 있느냐며 접시 안을 살폈다. 어이없게도 사야코는 괜찮다며, 그 정도는 괜찮다고 하였다. 차라리 머리카락이 있다고 말할 걸 그랬나. 아버지는 오히려 개미가 어딨냐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더니 아버지도 한계에 도달한 사람의 모습을 보이며 먹어 보라고 하였다. 나는 도저히 못 먹겠다고 말했다.


“개미가 기어 다니잖아요.”



아버지는 개미가 어딨냐고 우기다가 대체 개미 좀 나오면 어떠냐고 발끈하였다. 알마는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함이었는지 자신은 괜찮다고 하였다. 알마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사야코는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미안하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포크를 쥔 내 손끝은 부르르 떨려 왔다. 아버지의 눈빛도 만만치 않게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급기야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개미가 있었다고요.” 나는 굽히지 않고 대들었다.


“우리 눈에는 도통 안 보이는데 무슨 개미가 있다고 하는 거냐. 엉?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는 앤 줄 몰랐다.”


“뭐는 아셨어요? 아버지가 저에 대해 아는 게 뭔데요.”


“아니. 이런. 그러고 보니 괜한 시비를 걸러 온 게로구나.”


“아니에요. 전혀. 그럴 마음은 조금도 없었어요. 그렇지만 개미가 든 음식을 먹으라는 건 너무하셨잖아요.”


“그까짓 개미가 있기로서니 음식 만드느라 애쓴 사람을 이렇게 무안을 줘서 되겠냐. 성인이면 성인답게 굴어야지.”


 아버지는 내게 버릇이 없다고 하더니 참던 짜증을 호소하듯 생색이 대단하였다. 내가 온다 해서 당신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 줄 아냐는 등. 아버지는 불쾌감의 극치에 다다른 표정으로 내게 그런 자식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니 인생은 니가 살아라.”


“언제는 그렇게 안 살았던가요.”


사야코는 아버지의 분노에 동조는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았다. 사야코가 전적으로 아버지 편이라는 점이 다행한 일이었을까. 그 길로 나는 곧바로 뛰쳐나왔다. 알마도 허둥지둥 내 뒤를 따라 나왔다. 아버지는 내 뒤로 계속 소리를 질렀다. 마치 택시 요금을 내지 않아 욕을 먹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무례한 승객들에겐 항상 저런 식으로 욕을 했던 것 같다. 



그 뒤로 아버지와는 연락하지 않았다.  브라질에 와서 아버지와는 상관없는 삶이 사뭇 우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돌아갈 날이 며칠 남지 않았지만 아버지에게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났고.


짐 정리를 하고 있자니 알마가 들어왔다. 아직까지도 나타샤와 화해를 하지 않았는지 표정이 허전해 보였다. 나는 알마에게 그동안의 숙박비를 지급하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알마는 내게 브라질의 특산품이라 불리는 하바이아나스의 슬리퍼 두 켤레를 선물로 주었다. 나는 셀레브리티들의 파파라치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그 하바이아나스!라고 말하며 좋아했다. 대략 240과 280 사이즈로 보이는 핑크색 슬리퍼를 양손에 받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커플 슈즈라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핑크색을 좋아하는 건 물어보지 않아도 안다는 식의 표정이었다. 나는 280 사이즈의 슬리퍼를 흔들어 보이며 알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알마는 내 알 바 아니란 표정으로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더니 그 색을 좋아하는 남자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나는 알마가 준 슬리퍼를 가지고 아버지의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에게 사과도 하고 동생 얘기도 할 생각이었다. 차마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주변만 배회하고 있었다. 집안에 개를 키우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불이 켜진 창문 안으로 아버지와 사야코가 식탁에 앉아서 웃는 모습이 보였다. 사야코의 수줍은 표정. 아버지의 장난 가득한 웃음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도저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 내가 둘의 평화를 깰 수는 없으니까. 나만 바라보고 살다 무책임하게 죽은 엄마보다는, 무책임하게 굴어도 좋으니 살아만 있으면 다행이다 싶었다. 내심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브라질 표 아버지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에 동생이 인천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아직 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동생의 호기심이 절실하게 읽혔다. 기운 빠진 목소리로 아버지와 싸우고 나온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얕은 한숨을 쉬었다. 훈훈한 혈육 스토리를 기대했던 걸까. 차 안에서 우린 한동안 우울한 음소거를 하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결심을 한 듯 동생이 말을 꺼냈다.


가 싫다면 나도 싫어. 나는 괜찮아. 아버지 없어도, 안 봐도 돼. 그 사람이 먼저 연락해서 보자고 해도 나는 이제 안 본다. 페북 끊고 인스타그램으로 옮기던지 해야지.”


“너는 너고, 나는 나지.”


“나는 무조건 니편이다. 니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가족이니까 무조건 니편이다.”


엄마가 달큰하게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연아, 준아, 하면서 우리를 불렀던 때가 생각났다. 어느새 붉게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동생은 창업프로젝트에 성공해 돈 좀 모으면 다음엔 꼭 함께 리우데자네이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아버지와는 상관없는 브라질로 가자고. 정말로 아버지와 상관없는 브라질을 갈 수 있을까. 나는 알마에게 받은 핑크색 슬리퍼를 동생에게 선물로 주었다. 동생의 웃음폭발직전 표정을 보고 브라질 슬리퍼는 하바이아나스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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