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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토픽션

떨어질 운

by 무체


회색으로 표시된 그레이 라인은 한국의 1호선처럼 주로 낙후된 지역을 다닌다. 상습적인 정체는 기본이고 숫제 안 다닐 때도 있어 시간 맞추기가 늘 도박 같았는데, 오늘따라 별나게 일찍 도착했다.

지하철이 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너고 있다. 관광객들의 명소라지만 나는 가보지 못했다. 혼자 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너면 영원히 홀로 된다는 미챌의 말 때문이었다. 미챌의 말은 언제나 헛소리 같았지만, 나는 번번이 그 말을 믿었다.


미챌은 1년 전 햄버거 가게 줄에서 처음 만났다. 다짜고짜 한국인이냐며 말을 걸더니 자연스럽게 내 앞으로 끼어들었다. 뻔뻔한 새치기였지만 한국말이 그리웠던 나는 모른 척 넘어갔다. 미챌은 주한 미군과 결혼해 뉴저지에 산다고 했다. 남편이 파병 간 사이, 우리는 뉴욕의 거리를 하염없이 쏘다녔다. 그녀는 내게 현지 정보를 알려주곤 했는데, 좀 전 통화 내용도 그랬다. "오늘 '센츄리 21' 할인 대박이래. 당장 튀어가." 공항 가기 전 마지막 대화가 할인 매장 안내라니. "뭐래니." 미챌의 말버릇이 내게도 옮았다. '미친 거 아니야?'가 좀 바보 같다면, '뭐래니'는 좀 뷰융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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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온스퀘어 역에서 옐로 라인으로 갈아탔다. 샛노란 의자는 뷰융신같이 배열돼 있었다. 창가에 붙은 긴 의자와 마주 보는 4인석을 제멋대로 섞어 놓아, 앉아 있어도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맞은편 남성 커플의 뒤통수를 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며칠 전 엄마는 통화 중 정색을 했다. 북한이 또 미사일을 쐈으니 미국에 더 있다 오라는 거였다. 전쟁 나면 비상식량 챙기라던 할머니의 말과 다를 게 없었다. "됐고. 필요한 건?" "없어. 돈도 없는데 뭘…. 장지갑이나 장갑이나 사 오든지." "둘 중에 뭔데?" "아니야, 됐다니까." 전화를 급히 끊는 걸 보니 둘 다 필요한 게 분명했다. 뉴욕에 살면서 늘어난 건 돈 쓰는 영어뿐이었다. 영양제, 감기약, 운동화, 한국에 없다는 화장품…. 인지 부조화였다. 불안을 물건으로 채워 넣었지만, 밑 빠진 독이었다. 엄마의 '장지갑이나 장갑이나'라는 말이 가시처럼 걸려 나는 결국 센츄리 21로 향하고 있었다.


딴생각을 하느라 앞에 노인이 서 있는 줄도 몰랐다. 시간을 도둑맞은 기분으로 벌떡 일어나자, 노인은 괜찮다는 듯 알통 포즈를 취해 보였다. "아 엠 맨(I am man)." 뷰융신이 따로 없었다.


오후 두 시, 도시의 나사는 헐거워 보였다. 그때 맞은편 긴 의자에 앉아있던 거구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천장을 가리키더니, 살충제 맞은 해충처럼 빙글빙글 돌다가 바닥에 쿵, 처박혔다. 비명과 함께 몇몇이 다가갔다. 남자는 흰자위를 드러낸 채 거품을 물고 있었다. 중학교 때도 저런 아이가 있었다. 발작이 시작되면 아이들은 익숙하게 혀가 말리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단지 신이 내린 재수 없는 벌점 같은 것. 세상 어디에나 운이 나쁜 사람은 존재했다.


남자의 뇌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동안 열차는 멈췄다. 터널 초입에 대가리만 집어넣은 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뉴욕 거리에 넘쳐나던 간호사 복장의 사람들은 이럴 땐 코빼기도 안 보였다. "뉴욕은 위험해서 간호사들이 출퇴근 때도 유니폼을 입어. 일종의 생존 신호 같은 거지." 미챌의 말이 떠올랐다. 10분이 지나서야 제복 입은 경찰들이 들것을 들고 왔다. 그들은 로봇처럼 남자를 실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안내 방송이 나왔다. 창자 속에서 부패로 들끓다 나오는 거품 방귀 같은 소리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또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뭐래니."


열차는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썩은 닭장 냄새, 탄광 같은 어둠. 나는 이 도시의 낡음을 훈장처럼 여기는 태도가 싫었다. 불편함을 멋으로 포장하는 기만. 그런데도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뉴욕에 온 뒤로 나는 말라가고 있었다. 웰빙이니 요가니 하며 좋다는 건 다 했지만 소용없었다. 플러싱의 중국인 침술사는 내 눈을 까뒤집어 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홈씩(Homesick)." 고작 2년 살았는데 향수병이라니. 나는 미국이 체질이라 믿었다. 미트 패킹의 호텔 라운지에서 모히토를 마시고, 안젤리카 키친에서 두부 케이크를 먹으며 나는 내가 꽤 근사해졌다고 착각했다.


한 시간이 지나자 승무원이 핑크색 띠지 같은 블록 티켓을 나눠줬다. 승객들은 체념한 표정으로 티켓을 받아 쥐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비상벨 밑 금지 문구를 보았다. '하지 마시오'라는 경고는 죄다 한국어 아니면 중국어였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이 도시를 거부하며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자 탁한 습기가 폐를 찔렀다. 하늘에선 무언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요란한 굉음이 고막을 때렸다. 낯익은 타악기 소리. 오색 옷을 입고 상모를 돌리는 사람들. 아, 오늘 코리안 퍼레이드가 있다고 했지. 존이 보일 것 같았다. 존은 내 영어 선생이자, 머리 검은 미국인 입양아였다. 둥근 얼굴에 납작한 뒤통수. 그는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납작했다. 한국말은 한마디도 못 하면서, 최근 부쩍 한국에 집착했다. 이번 퍼레이드에 입양아 자격으로 나간다며, 나더러 꼭 보러 오라고 했었다. 사실 나는 갈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떠난다는 말도 안 했다. 그런데 하필 이 난장판 속에서 존이 저기에 있었다.


퍼레이드 행렬 뒤로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 한아름 마트 직원들, 늙어버린 참전 용사들. 푸른 눈의 노인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울먹였다. 그 뒤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찢어질 듯 울렸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소음이 거리를 뒤덮었다. 드디어 존이 보였다. 퍼레이드 행렬 속에 섞인 그는 노예 시장에 끌려온 사람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두리번거리는 모습. 문득 누런 개가 떠올랐다. 한국 점집에서 내 조상 중 하나가 누런 개로 환생했으니 개고기는 입에도 대지 말라던 그 말. 존의 눈빛이 딱 그 개였다. 겁먹은 누런 개.


"존!"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소음 탓인지 존은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허공만 두리번거렸다. 그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불현듯 나는 홀린 듯 폴리스 라인을 넘었다. "존! 룩 앳 미, 존!"


그 순간, 푸른 눈의 경찰이 내 앞으로 권총을 겨눴다. 그가 무언가 소리쳤다. 스톱이었는지, 겟 백이었는지. 하지만 내 귀엔 사이렌 소리와 꽹과리 소리만 윙윙거렸다. '뭐래니.' 나는 습관처럼 중얼거리며, 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겁먹은 개를 달래주려는 주인의 심정으로. 경찰이 아니라, 오직 존의 흔들리는 눈동자만 보였다. 내가 한 발짝 더 내딛는 순간이었다.


타앙―


고막을 찢는 굉음이 터졌다. 폭죽 소리인지 총성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리가 풀렸다. 내 몸은 지하철의 그 남자처럼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손에 쥐고 있던 핑크색 띠지가 나비처럼 허공으로 날아갔다. 아스팔트 바닥에 뺨이 닿았다. 차가웠다. 눈앞이 흐릿해지며 푸른 물속 같은 하늘이 펼쳐졌다. 돌고래 한 마리가 유영하듯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존이 보였다. 그는 내가 바닥에 처박힌 줄도 모르는 듯했다. 총소리에 놀란 그는 대열을 이탈해, 겁먹은 개처럼 꽁무니를 빼고 도망치고 있었다. 뷰융신이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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