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설 모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체 May 04. 2024

누구의 잘못

생각해 보니 나는 친구들로부터 소외도 많이 당하고 살았다. 워낙 나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사느라 차별을 의식하지 못한 거다. 그러나 가끔 꼼꼼하게 과거를 헤집고 나면 아! 그것이 왕따란 것이었구나, 하며 뒤늦게 깨닫곤 했다. 그러니까, 내가 왕따를 당했던 거다.


나의 불행한 과거를 회상하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누군가, 나를 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지인이 이렇게 말했다.


-너도 인생이 참 파란만장하지 않았어? 그런데 워낙 긍정적이라서 잘 극복하고 산 것 같은데?


그의 말이 마치 약점을 들킨 사람처럼 가슴에 와닿았다.


-내가 그렇게 보였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파란만장했지?


그 뒤로 대화가 이어지진 않았지만, 글쎄 그가 사람은 누구나 파란만장한 인생의 단편이 있으니 그런 잣대로 에둘러서 이야기한 것인지 나의 생활을 유추하면서 알아맞힌 건지는 알 수가 없지만 , 그로 인해 나의 불행한 흑역사를 되짚어 보기로 했다고나 할까. 잊고 있던 아니 잊고자 했던 나의 불행한 과거로 돌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특별히 건질 것도 없으면서. 지금 내가 그 불행한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건지 이만하면 살만하다 혹은 행복하다로 만족하며 사는 삶이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바람 같은 비가 내린 날이었다. 날이 우중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보통 비 오는 날은 거리가 조용하기 마련인데 밖에서는 소란한 말소리가 들린다. 요란하고 괴상한 비명소리도 들린다. 나는 어느 역전 대합실을 연상케 하는 직사각형 모양의 카페 2층 테라스에 앉아 있다. 나는 인형같이 조용한 강아지 한 마리를 옆에 앉혀두고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목적 없이 아무 거나 막 쓰는 것을 지나치게 좋아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항상 커피를 홀짝거리며 무언가를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나의 강아지 이런 나를 언제까지고 기다릴 줄 알았다. 가끔 다른 것에 시선이 갈 때도 있긴 했다. 바로 조금 전에 두 돌이나 지났을까 싶은 어린아이가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보였고. 그러나 그 아이는 강아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져서 시선이 머무를 틈도 없었다. 본래부터 아이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기압이 낮은 날이어서 그런지 유독 소음이 크게 들렸다. 맞은편 상가에는 내부 공사가 한창인지 연일 드릴 소리가 들렸고 아이 엄마들이 모여있는지 간헐적으로 아이들의 충동적인 괴성도 들려왔다. 괜히 왔다 싶을 정도로 소란함의 연속이었지만 좀처럼 손가락이 멈추질 않고 있었다. 어디선가 우당당탕 무언가를 부시는 소리로까지 치달았다.  뭔가 대단히 큰 사고라도 생긴 모양이다. 카페에 드문드문 앉아 있는 사람들이 미동을 하지 않는 걸로 보아서 카페 내부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밖의 세상에서 벌어진 일들이겠지. 싸우고 부시고 우는 소리는 수시로 들리기 때문에 배경음악처럼 넘어갈 수 있었다. 테라스 안쪽에 앉아 있기 때문에 테라스 밖을 내다보려면 일어나서 몇 발자국 걸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일어난다면 잠자는 강아지가 놀라서 짖을 게 뻔하다. 그냥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게 상책이다.



이 사건이 저들에게 오랜 기억으로 남을지 망각으로 잊게 될지 알 수는 없다. 나는 그들이 보이지도 않고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상태이지만 크게 관심이 가지도 않다. 생각하건대 하찮은 사람들의 별 것 아닌 싸움임에 틀림없다.


카페 옆에는 편의점이 있다. 편의점 앞에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파라솔이 비치되어 있는데 노점상을 하는 분식점 아저씨나 과일 파는 아저씨가 주로 앉아서 술을 마시는 곳이기도 하다. 어쩌다 행색이 난무한 사람이 컵라면에 소주를 마시고 가기도 하고 일용직의 노무자가 빵과 우유를 사 먹기도 한다.  그곳에 젊은 사람들은 도통 앉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한 번 물이 그렇게 만들어지면 그곳은 그런 사람들만 정착하는 곳이라는 걸 사람들은 배우지 않고도 잘 아는 모양이다. 분명 그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 게다.



과일 파는 아저씨는 오로지 술값을 벌기 위해 과일을 팔고 떡볶이를 파는 아저씨는 장사하는 아내를 감시하기 위해 매일같이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아내가 벌어온 돈으로 술을 마시고 과일 파는 아저씨는 과일을 팔 때마다 술을 한 잔씩 들이켠다. 한 번도 씻은 적이 없던 것 같은 더럽고 굳은살이 잔뜩 박힌 손으로 예쁘고 향기 나는 과일을 재주 좋게 팔아 낸다. 이상하게 그곳의 과일은 맛이 좋아 찾는 사람도 많았다.


 우당탕하는 소리는 멎었지만 한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린다. 떡볶이 집 아내 일수도 있고 지나가는 여인 일수도 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소리가 부쩍 크게 들다.  


나는 테라스 쪽을 쳐다보고 카페 내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한 테이블 밖에 사람이 없는데 그녀 역시 무연한 표정이다. 아마도 고 있는 것 같다.



카페는 외부의 잡음만 아니면 대체로 조용한 편이다. 나는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유일하게 허용된 테라스 공간만 이용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 다소 춥더라도, 갖은 먼지를 뒤집어쓰더라도 고맙게 이용해야 한다.


나는 언제까지고 카페가 지금처럼 장사가 안 되길 바랄 뿐이다. 사람 많은 곳은 딱 질색이기 때문이다. 카페는 마치 내 집 서재같이 편안하다. 카페 주인은 책을 한 번도 읽지 않은 모습이지만 카페에는 책과 잡지가 다른 곳보다 많은 편이다. 나는 이곳에서 책을 읽고 가끔 공부도 하고 번역 일 하면서 시간 때우기를 즐기는 편이다.


잠잠할 것 같던 밖의 분위기는 점입가경이다. 또 다른 굵고 우렁찬 목소리의 남자가 등장하였는데 미약하게 천둥이 치는 것 같다. 왜 이리 소란스러운 걸까. 나도 이쯤에선 내려다보고 싶었지만 귀찮음을 이기지 못했다. 상황을 고조라도 시켜주듯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고 있었다. 조만간 큰 비가 오려나 보다. 과일 가게 아저씨는 철수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일 가게 아저씨는 보이지 않고 있다. 나는 애써 신경을 다른데 돌리고자 애썼다. 시시콜콜 사소한 일에 관심을 두는 일은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 와중에 차 사고까지 났나 보다. 끼익 하면서 급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들렸고 무언가 쿵 하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커다란 사고가 났음이 틀림없다. 나가보고 싶었으나 웬일인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조금 있으려니 경찰 두 명이 올라왔고 나는 그들을 흘긋거리며 보다 다시 집필에 몰두했다. 그들은 테라스 문을 열더니 내 앞에 섰다.









졸지에 나는 증인이 되었다. 보고 들은 것이 없는데 어떻게 증인이 되느냐고 반문하는데도 자리를 뜰 수 없다고 한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카페 안에서 졸고 있던 여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서 아이가 떨어진 걸 못 보신 거예요?”

"네? 뭐라고요?"

“아래 안 보이세요? 아이가 떨어져 즉사했습니다.”


설마 좀 전에, 찰나의 모습만 보여주던 그 아이가 떨어졌다는 건 아니겠지?




설마 했던 그 아이가 맞았다. 아이가 순식간에 사라진 이유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대체 그 시간에 아이 엄마는 어디에 있었던 걸까.


"최대한 협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보고 들은 게 없습니다. "

"그러나 이 자리에 계속 앉아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전 보지 못해서 아무 말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이를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죠?"


아이를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아이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고 내 시야의 사각지대 경계에 머물렀던 그 아이는 노란 실루엣을 한, 아장아장 겨우 걸음마를 뗀 것 같은 모습으로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내가 아이를 볼 의무가 있던 걸까. 아이의 모습은 착각 혹은 혼동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인간보다 몇 배 예민하다는 강아지도 아이의 존재를 모르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나더러 못 봤느냐고 묻다니.



"그러니까요.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난데없이 증인이라니. 혹은 용의자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되지 않는가. 내게 방조죄라도 적용하려는 건가?  cctv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무죄를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아이의 엄마가 아무리 나를 원망하는 눈으로 보아도, 아무리 카페 주인이 내게 좋은 평을 하지 않았어도 나는 잘못이 없었다. 내게 잘못이 있다면 지나치게 집중해서 글을 쓰고 있었다는 것과 주변에 무관심했다는 것뿐이다.


Cctv로 확인한 나의 모습은 아이와는 전혀 무관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나는 0.1도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심지어 눈동자조차도 돌아가지 않았다. 아이는 내가 말한 대로 나를 찰나에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아이를 위태로운 테라스까지 홀로 걸어가게 한 엄마의 잘못이 크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아이가 떨어진 순간에, 내가 손만 내밀면 아이의 추락사를 막을 수 있다는 물리적 거리 때문에 나는 주변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이것은 사회적 이슈로까지 번졌다.



 어떤 유명 칼럼니스트는 나를 소재로 방관 혹은 과잉 집중에 관하여 글을 썼다. 내가 이 상황에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게 맞는 건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아이의 엄마보다 더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다. 어떤 시사 채널에서는 사람보다 개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 토론을 벌였다. 모자이크 처리된 카페 주인은 명백하게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갈 수 있겠다 싶었던 걸까. 갈 때마다 상냥하게 내 기호대로 커피를 내려주던 사장은, 나를 진상 오브 진상으로 묘사하였다. 강아지를 데리고 와서 커피 한 잔 시키고 몇 시간씩 앉아 있다가 는 민폐녀라는 소리였다. 나름 단골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상이었다니. 배신감이 들었다. 커피 한 잔만 마신 것도 아니고 이틀에 한 번 꼴로 토스트도 주문하고, 좀 오래 앉았다 싶으면 음료도 추가 주문해서 마셨는데 그런 얘기는 쏙 빼놓았다. 나를 두둔했다가는 손님이 끊길 것을 염려했을 테지. 태세 전환을 저리 잘하면서 장사 수완은 없었다니.



나에 대한 비난은 나처럼 과잉집중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사회적 문제로 번지고 있었다. 그러나 집중력이 높은 게 죄나 병은 아니지 않나? 아이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소리 없이 떨어진 것이 전적으로 내 잘못인가. 아이를 방치한 엄마 잘못인데, 슬픔에 빠진 엄마를 비난하는 것은 도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 탓인지 나한테만 화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너무 억울다.


결과적으로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태로 끝난 일이지만 나는 두 번 다시 그 장소를 찾지 못했고 일말의 죄책감마저 가지게 되었다.


 죄책감이라기보다는 잘못을 찾는 데 골똘했다고 보는 게 맞다. 나는 대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편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