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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토픽션

방관의 죄

by 무체

생각해 보니 나는 친구들로부터 소외도 많이 당하고 살았다. 워낙 나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사느라 차별을 의식하지 못한 거다. 그러나 가끔 꼼꼼하게 과거를 헤집고 나면 아! 그것이 왕따란 것이었구나, 하며 뒤늦게 깨닫곤 했다. 그러니까, 내가 왕따를 당했던 거다.

나의 불행한 과거를 회상하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누군가, 나를 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지인이 "너도 인생이 참 파란만장하지 않았어?"라고 물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마치 약점을 들킨 사람처럼 가슴에 와닿았다. 그로 인해 나는 잊고 있던, 아니 잊고자 했던 나의 불행한 흑역사를 되짚어 보기로 했다.

어쩌면 내가 남들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게 된 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주변의 따돌림에 무감각해지면서 자연스레 나만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에 집중하면 다른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외로움도, 상처도 느끼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과잉집중은 나의 유일한 방어막이 되었다.

바람 같은 비가 내린 날이었다. 나는 어느 역전 대합실을 연상케 하는 직사각형 모양의 카페 2층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인형같이 조용한 강아지 한 마리를 앉혀두고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목적 없이 아무거나 막 쓰는 것을 지나치게 좋아했다.


기압이 낮은 날이어서 그런지 유독 소음이 크게 들렸다. 맞은편 상가의 드릴 소리, 시장통의 호객 소리, 취객들의 고함. 그 모든 소음이 내 고막을 두드렸지만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소음은 그저 내 세계의 BGM일 뿐이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볼륨을 높였다. 외부의 잡음이 물러나고, 모니터 속의 하얀 여백만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글을 쓰는 순간, 나는 투명한 캡슐 안에 갇힌다. 밖에서 누가 싸우든, 누가 울든, 그것은 내 캡슐 벽을 두드리는 둔탁한 진동 정도로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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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모니터 오른쪽 구석, 내 시야의 사각지대에서 노란색 무언가가 아른거렸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두 돌이나 지났을까 싶은 어린아이였다. 아이는 테라스 난간 틈으로 팔을 뻗어 빗물을 잡으려는 듯 위태롭게 서 있었다.

'위험한 거 아닌가?'

순간, 입을 떼어 "위험해!"라고 소리칠까 망설였다. 하지만 그러려면 이어폰을 빼야 하고, 고개를 들어야 하고, 어디선가 수다를 떨고 있을 아이 엄마와 눈을 마주쳐야 한다. 오지랖 넓은 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지금 막 떠오른 이 문장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설마, 진짜 떨어지기야 하겠어? 엄마가 보고 있겠지.'

나는 애써 그 불길한 예감을 뭉개버리고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내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쉼 없이 움직였다. 아이의 존재는 그저 희미한 그림자처럼, 성가신 날파리처럼 내 의식의 가장자리를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그리고 3초 뒤, 끼익 하는 급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무언가 둔탁하게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테라스 밖을 내다보려면 일어나서 몇 발자국 걸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일어난다면 잠자는 강아지가 놀라서 짖을 게 뻔하다. 카페 내부의 사람들도 웅성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다. 나는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게 상책이라 판단했다.

조금 있으려니 경찰 두 명이 올라왔다. 그들은 테라스 문을 열더니 내 앞에 섰다. 졸지에 나는 참고인이 되었다. "여기서 아이가 떨어진 걸 못 보신 거예요?" "네? 뭐라고요?" "아래 안 보이세요? 아이가 떨어져 즉사했습니다." 설마 좀 전에, 내 시야를 귀찮게 하던 그 노란 실루엣이?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태연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저는 이어폰을 끼고 글을 쓰고 있어서 몰랐습니다." "바로 옆에 계셨는데도요?" "집중하면 주변 상황을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못 믿으시면 CCTV 확인해 보세요."

CCTV는 나의 결백을 증명했다. 화면 속의 나는 0.1도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심지어 눈동자조차 돌아가지 않았다. 법적으로 나는 완벽한 무죄였다. 아이를 방치한 엄마의 잘못이 명백했다. 하지만 세상의 판결은 달랐다. 사건은 맘카페와 SNS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아이 추락 사고'라는 팩트보다, '바로 옆에서 글만 쓰고 있던 여자'의 존재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슬픔에 빠진 아이 엄마를 비난하는 것은 도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 탓일까. 갈 곳 잃은 대중의 분노는 만만한 나에게로 쏟아졌다. "사람이 죽었는데 태연하게 앉아있어?" "강아지는 챙기면서 애 떨어지는 건 몰랐다고? 소시오패스 아니야?"


자주 가던 카페 주인마저 태도를 바꿨다. 갈 때마다 내 취향대로 커피를 내려주던 상냥한 사장은, 나를 '가게 망친 진상 손님' 취급했다. "손님, 당분간은 좀 오지 말아 주세요. 맘카페에 소문이 나서 우리 가게까지 욕을 먹고 있어요." 나는 억울했다. 내가 아이를 밀었나? 아니면 내가 베이비시터라도 되나? 내게 잘못이 있다면 타인의 불행에 관심을 끄고 내 일에 지나치게 집중했다는 것뿐이다. 그게 죄가 되는 세상이라니.

결과적으로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고로 종결되었지만, 나는 두 번 다시 그 동네를 찾지 못했다. 밤에 혼자 있을 때면 아직도 그 아이의 노란 실루엣이 떠오른다. 술에 취한 아저씨들과 쿵쿵거리는 공사 소리, 비 내리는 소리에 묻혀 아이의 비명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들렸다 해도 나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법적으로는 내게 잘못이 없다. 도덕적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귀찮음'이 계속해서 명치끝을 찌르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확신이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세상은 나를 비난했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들의 죄책감을 덜어줄 희생양이 필요해서였을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그 아이의 눈에 내가 마지막으로 비친 순간, 그 아이는 무엇을 보았을까? 자신이 떨어지기 직전까지도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는 무관심한 어른의 뒷모습. 그 차가운 등이 아이가 본 이 세상의 마지막 풍경이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다른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쓴다. 여전히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고, 여전히 이어폰을 꽂는다. 볼륨을 더 높인다. 세상의 시끄러운 오해와, 강요된 슬픔과,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내 세계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가끔 시야 구석에서 무언가 어른거릴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섣불리 쳐다보았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들의 안전까지 내가 책임져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을 테니까.

나는 모니터 커서를 응시한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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