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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체 Apr 22. 2024

소멸한 주인공


날이 무척 덥다. 전년보다 유독 가문 데다 조류 인플루엔자 때문에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때문에 각종 유언비어가 떠돌다 다녔고 그 덕분에 두 사람에 한 사람꼴로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은 입 주변에 땀띠가 날 것 같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마스크 수요가 급증하자 고객 유치 차원에서 물티슈를 나눠주던 치과에서도, 마른 티슈를 나눠주던 교회도 마스크로 상품을 대체했다. 상황은 점점 더 심각했고 혹여 누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헛기침만 해도 주위의 눈총을 받았다. 보건부에서 나온 사람들은 방역복 차림으로 감염 의심자를 무작위로 잡아 차에 태웠다. 거리 곳곳에는 방역차에 타지 않으려고 승강이가 벌어지는 일이 빈번했다. 외출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지속되니 사람들은 실내에만 콕 박혀 텔레비전이나 유튜브를 시청했고 덕분에 호황을 맞은 방송사들은 지상파, 종편 할 것 없이 평소보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신 피디는 새로 구상한 프로그램의 게스트 섭외로 고심 끝에 동네 친구 지수를 불렀다. 불현듯 지수의 동생 지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몸은 완치된 거지?”


  지수는 신 피디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뭐가? 설마 지안이를?”


  신 피디는 지수를 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다독였다.


  “설득은 네가 해. 나는 능력 밖이야.”

  “뭘 그런 걸 걱정해. 내가 다 알아서 해. 되든 안 되든. 그러니 댁은 신경 쓰지 마시고.”


   지안은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청순했다. 학창 시절에도 지안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이 적지 않았고.


  “안 된다면 할 수 없고. 그래도 함 물어나 보게 연락처 좀 알려줘.”


  지수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거절할 변명거리도 찾지 못했다.


  지안은 신피디가 백만 년 만에 안부를 물어오는 신 피디가 무척 반갑고 설렜다. 지안과 신 피디는 십 년이 넘게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사회인이 된 뒤부터는 서로 얼굴 한 번을 못 보고 지냈었다. 어쩌다 우연히 만날 법도 했는데 시차가 맞지 않았다. 지안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긴 내 오빠도 자주 못 만나고 사는데.”


 지안과 신피디는 어릴 때부터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름도 한강인, 한강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값이 비싸지 않던 초기 입주자라 처음부터 부자는 아니었다. 게다가 지안의 아버지는 건드리는 것마다 말아먹는 마이너스 손이라 빚이 많이 쌓였다. 겨우 아파트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언제 경매에 붙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지안은 따로 모아 놓은 돈도 없어서 차마 독립은 꿈도 못 꾸고 있었다. 지수 역시 이제는 부모 집에 얹혀산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나이를 먹었지만, 아직까지 결혼은 아득히 먼 이야기 같았다. 그런가 하면 신 피디 집안은 지안네 집과는 달랐다. 한강 아파트는 이십 평대부터 칠십 평대까지 다양했는데 신 피디 부모는 가장 작은 평수로 이사해 지금은 제일 큰 평수에 살고 있다. 부모가 동네를 떠나기 싫어해 아파트 평수만 늘려간 거다. 신 피디 부모는 현재 크루즈 여행 중이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부모는 돈이 많아졌고 점차 동네에서 손꼽을 정도로 부자가 되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벤치는 한강 아파트의 프리미엄을 높이는데 일조했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그곳에 들르는 거주자들은 드물었다. 강바람을 쐴 거면 둔치로 걸어가는 게 낫고 한강을 구경할 거면 집안에서도 훤히 보이는 풍경이니 구태여 주차장 바로 앞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 피디는 급하게 만나자고 해놓고 막상 떠오르는 장소가 없어 벤치 앞에서 보자고 하였다. 십 년 전에는 그곳에서 가끔 만나 차도 마시고 미래에 관한 얘기도 나누었던 기억 때문인지. 아닌 게 아니라 먼저 도착한 신 피디는 벤치에 앉아있으니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머리 색깔이 풋풋하게 푸르던 시절 자신이 피디가 될 거라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절을 말이다.

신 피디는 지금의 이 익숙하면서 낯선 기분이 싫지 않았다. 대체 그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지안은 약간 넋이 나가 보이는 신피디의 어깨를 꾹 눌렀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아! 왔어? 아!....”


  신 피디는 잠시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몰라보게 달라진 지안의 모습과 비로소 실감하게 된 시간 때문에 기분이 이상했다. 하나도 변한 건 없는데 모든 게 변했다는 사실이 새삼 먹먹하게 와닿았다. 그래서인가 신 피디가 지안을 처음 본 느낌은 반갑다기보다는 무언가를 찾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안은 대학 병원 간호사로 일하다 갑상샘 암 진단을 받아 휴직 중이었다. 갑상샘 암은 종기 떼어내는 수술보다 간단했지만 지안은 이참에 휴직 신청을 했다. 간호사가 되기 전에는 항공사 내근직으로 일했었다. 그러다 곧 싫증을 느끼고 다시 대학에 들어가 간호사가 되었다. 막상 간호사가 되면 좀 더 나을 줄 알았던 기대와는 다르게 그곳 역시 고만고만했다. 오히려 피로도는 더 쌓였다. 처음 발령받은 곳이 암병동이었기 때문이다. 지안은 매일 죽어 나가는 환자를 보며 겪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지안에게 찾아온 병도 그 때문일 것으로 추측했다.


  신 피디는 지안에게 오랜만이라거나 반갑다는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성급하게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알지? 소개 남녀 거기 출연할 생각 없어?”


  급진적인 신 피디의 말투에 지안은 당황했다. 지안은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대체 자신이 뭘 생각하고 왔던 거지? 지안은 갑자기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신 피디의 다그침에 겨우 정신을 차린 지안은 모호한 대답을 하였다.


  “글쎄.…”

  “뭐가 글쎄야 짱짱한 남자들로만 구성했어. 이참에 너 시집 제대로 잘 가게 해 줄게. 오키? 하는 거다. 모기 물린다. 얼른 들어가자.”


  지안은 옆에서 신 피디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이해하질 못한 채 집으로 왔다.


  “오빠는 미리 알고 있던 거야?”

  “대충. 근데 한다고 했어?”

  “모르겠어. 내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얼레벌레한다고 했구먼.”

  “그렇게 된 건가?”

  “그렇게 된 거다.”


  첫 녹화를 하는 날이었다. 지안은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럽게. 아시겠죠?”

   “어머, 나 못 믿나 보다.”

   “에이 또 무슨 소릴.”


   조연출은 넉살 좋은 표정을 지으며 나갔고 메이크업 실장은 그녀의 어시스트와 조연출 흉을 보았다.


  “꼭 저렇게 나선다. 쟤는.”

  “피디님한테 하도 구박을 받아서 그런 것 같아요. 지도 풀 때가 있어야죠.”

  “쟤는 저래서 피디한테 욕을 먹는 거야. 참견할 거나 안 할 거나.”


  메이크업 실장과 어시스트의 얘기가 피디의 사생활로 흘러갈 때 즈음 화장이 끝났다. 지안은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이게 다예요?”

  “네?”

  “아니, 그게 아니라.”

  “뷰티 메이크업이 아니라 내추럴 메이크업이라서 그래요. 피부도 좋고 이목구비도 뚜렷해서 아주 조금만 했는데도 확 달라 보이네.”


  메이크업이 끝나자 스타일리스트가 옷을 가져왔다. 지안은 그녀가 펼쳐든 의상을 보고 주저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제 옷 그대로 입으면 안 되나요?”


  스타일리스트 옆에 있던 메이크업 실장이 오히려 눈을 흘기고 있었다.  한여름에 털모자를 머리에 걸치고 온 스타일리스트는 메이크업 실장보다 훨씬 당차 보였다.


  “예쁜 옷을 입는 게 아니라 콘셉트에 맞게 입는 거예요.”

  “콘셉트가 뭔가요?”

  “콘셉트 몰라요? 씨. 오. 엔. 에스. 피. 티!

  "네? “

  “대본에 콘셉트에 맞게 옷도 그렇게 입는 거예요.”


  한쪽 귀에 북두칠성 모양의 귀를 뚫은 스타일리스트의 귀걸이도 말투도 거슬렸다. 그래서 지안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무슨 리얼 다큐를 씨. 오. 엔. 씨. 이. 피. 티에 맞게 입나요?”

  “네?”


  스타일리스트가 지안을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지안은 스타일리스트의 손에 들린 옷을 낚아 채 탈의실로 들어갔다. 마지못해 옷을 갈아입은 지안은 스타일리스트를 따라 신 피디 앞으로 갔다.


  “대중적인 취향으로 잘 맞게 입혔네.”


  스타일리스트의 어깨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 프로그램에도 콘셉트가 있었어? 이거 리얼 아니야?”

  “리얼 맞지. 그래도 약간의 프레임은 정해 두는 게 덜 혼란스러우니까.”


  게스트와 피디가 말을 트고 지내는 사이란 걸 안 스타일리스트는 별안간 태도가 달라졌지만 지안은 고만한 일로 우위에 서는 기분 따위를 즐길 타입은 아니었다.


 화장하고 옷을 입고 세팅하는 데만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제작진은 미리 준비한 간식을 지안에게 권했다. 그런 사이 조연출이 다가오더니 곧이어 인터뷰를 딸 거라 하였다. 뒤따라온 작가는 몇 가지 문항을 내밀고는 참고만 하라고 말하였다. 지안이 문항을 읽고 있는데 줄곧 바쁘고 피곤해 보이던 신 피디가 곁으로 왔다.


 “여기가 좋겠다. 호텔을 배경으로 하고... 음... 수영장 옆이 더 나으려나 고즈넉하니. 여기 반사광 좀 해줘. 조도 조금만 더 높였으면 좋겠네요. 날이 금세 어두워졌네. 아직 대낮 씬인데.”


  조연출이 지안을 의자에 앉혔다. 신 피디가 말했다.


  “편안하게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돼. 이건 리얼 다큐니까.”


  지안은 상황 설정은 다 해놓고 리얼 다큐라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지안의 표정을 읽은 신 피디가 거들었다.


  “원래 방송이 다 이래. 리얼이 어딨어? 방송은 다 설정이야.”  


  신 피디는 편집을 따로 할 것이기 때문에 아무 말이나 해도 상관없으니 편안한 표정만 지어 달라고 하고는 어느샌가 사라졌다.

 유난히 육덕져 보이는 여자 작가가 나타나 지안에게 물었다. 평소 이상형에 관하여.


 “성격이 좋고 밝은 사람이면 좋겠어요.”

 “보다 구체적으로 답변을 해주세요. 예를 들어 돈이 많다거나.”

 “돈이 많으면 더 좋죠. 키도 크면 더 좋고. 그런데 더 좋다는 것이지 절대 조건은 아니에요.”


 작가는 점차 지안의 집안 배경부터 자라온 환경까지 캐물었다. 지안은 분위기상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왔다. 경제적인 궁핍함을 겪은 얘기. 겉만 좋은 집에 살던 불안감 따위를 얘기했다. 사람 좋고 무능한 사람은 싫을 것 같다고도 말했다. 연애는 많이 못 했다는 말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놀다가 뒤늦게 벼락치기로 공부했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서 스펙 쌓느라 연애할 시간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회사 생활 적응하면서 짧게 연애를 몇 번 한 적이 있지만 진지한 관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간호대 입학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연애할 시간이 없었고 병원에 취직한 뒤로도 계속 바빴고 아프기까지 해서 휴직한 얘기도. 암에 걸린 얘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작가가 캐묻는 통에 대답하고 말았다.


  인터뷰를 끝으로 그날 촬영분이 끝났다. 다음은 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 피디는 조연출을 따로 불러 얘기하였다.


  “어쩌면 다음 촬영 분량으로 넣을 수도 있으니까 티 안 나게 찍어둬.”


  인터뷰할 때부터 먼발치로 지안의 파트너가 될 두 남자가 서성거리는 게 보였지만 공식적인 만남 전이라 회식 때도 일부러 거리를 두고 앉았다. 신 피디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작가와 먼저 나갔다. 신 피디는 빠듯한 촬영 스케줄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출연자 한주호는 유명 재력가의 자제이자 유학파 출신의 엘리트 경영인이다. 서른여섯의 나이에 키가 180이 넘는 누가 봐도 멋진 남자다. 신 피디는 그의 여러 가지 요소가 여성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 것이라 확신했다. 또 다른 출연자 김재원은 한적한 동네의 병원 수의사다. 나이는 서른셋으로 지안과 동갑이며 이 년 전 결혼 후 한 달 만에 아내와 사별했다. 그의 애틋한 얘기는 말미에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하여 사용될 예정이다.


  신 피디는 스타일리스트를 불렀다.


  “김지안 옷을 드레시하게 갈아입혀. 호텔 바 씬이니까.”


  잘 빠진 몸매를 부각한 심플한 검정 원피스를 입은 지안은 신 피디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녀는 예상외로 캐주얼한 카페로 향했다. 조연출이 다급하게 신 피디 곁으로 다가왔다.


  “어떡할까요? 빠로 가라 할까요?”

  “할 수 없지 뭐. 일단 내버려 둬. 아! 쟤는 왜케 티피오 센스가 없냐. 저렇게 입혀 놨으면 빠로 가야지 카페가 뭐니.”


  리얼 다큐를 가장한 프로그램이니만큼 일반인 출연자에게 일일이 구체적인 요구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교묘히 유도를 하고 있었는데 늘 변수가 작용했다. 각본상 지안은 한주호와 로맨스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바에서의 근사한 만남을 기획한 것인데 예상치 않게 지안이 돌발 행동을 한 것이다. 이를 본 스타일리스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시스트를 보며 지안을 욕했다.


  “쟤가 아주 나를 엿 먹이려고 하네.”

  “왜요? 실장님?”

  “너 못 들었니? 내가 좀 전에 옷 입혀주면서 얘기했었잖아. 저거 일부러 카페로 간 거야.”


  스타일리스트는 지안에게 두 벌의 옷을 가지고 갔었다.


  “이건 카페용 이건 빠용. 이걸로 갈아입으세요.”


  스타일리스트가 지안에게 노골적으로 얘기했지만 지안은 알아채지 못했다.


  “되게 둔하네. 너 같으면 빠용이에요라고 했는데 빠를 가겠니 카페를 가겠니?”

  “당근 빠죠.”

  “상식 아니니?”



1회분 방송이 급하게 편집되어 당일 촬영분으로 방영되었다. 거의 생방송에 가까운 시간 타임으로 긴박함을 더했다. 예상대로 시청률 및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방송이 나가는 동안 지안은 재원과 얘기 중이었다. 밖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재원과 헤어진 지안은 두 번째 장소로 주호가 있는 bar로 향했다. 주호의 인상은 깔끔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누가 봐도 완벽에 가까운 남자였다. 유쾌한 저녁 만남 이후 지안은 객실로 돌아갔다. 카메라가 풀샷으로 돌진 않을 거라고 했으나 지안은 조금 불안했다. 욕실에서 옷을 벗고 씻는 동안에도 좀처럼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안은 침대에 누워 성급하게 불을 껐다. 노곤한 탓인지 일찍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조식은 셋이 함께하는 일정이다. 촬영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셋의 분위기는 좋았다. 지안은 따뜻한 제주도의 풍경과 햇살 아래 모처럼 긴장이 풀렸다. 아침 식사를 다 끝내고도 셋은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카메라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지만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조금 있으려니 신 피디가 그들 곁으로 왔다. 그리고 1회 방영분을 보여 주었다. 지안은 쑥스럽다며 따로 보길 원했다. 나중에 따로 1회 촬영분을 본 후 지안은 신 피디에게 불만을 얘기했다. 자신이 터무니없이 궁핍하게 나온 것 같다는 것과 병에 관한 언급도 불쾌하다고 말했다. 신 피디는 극적 효과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지안은 인터넷 댓글도 읽었다. 여자 출연자가 촌스럽다 빈티 난다, 두 남자에게 주기에는 과분하다는 평이 많았다. 지안은 예측하지 못한 악플에 당황했다. 신 피디는 그런 지안을 위로했다.


  “그냥 번개같이 왔다 갔다 하는 것들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지안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시청자들은 압도적으로 한주호를 좋아하였다.  지안은 조금 찜찜한 기분도 있었지만 다른 스태프들과도 친해진 탓에 분위기는 쉽게 적응이 되어 갔다. 남자들과의 관계도 각각 친근감이 생겼다. 방송 관계자는 지안이 주호와 이어지는 분위기로 몰고 갔고 지안도 그에 이끌려 가는 듯했다.


모처럼 재원과 해변을 산책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각본은 주호와 지안이 잘 되는 것으로 짜여 있었지만, 재원은 지안에게 진심을 다했다. 지안은 재원의 노력과 매력이 더해져서 점점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신 피디는 되도록 이벤트나 분위기를 주호와 지안과의 스토리에 집중하였다. 지안에게도 주호에 관한 좋은 말을 많이 하였다. 촬영이 진행되지 않는 시간에도 신 피디는 주호와 지안의 시간을 자주 갖도록 부추겼다. 그렇게 지안에게서 재원은 멀어졌다. 지안과 주호와의 시간이 많아질수록 재원은 점점 존재감이 없어지고 있었다.


  지안은 촬영 이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선택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 이만저만한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촬영이 모두 끝날 즈음이면 3회 차 방송이 나가고 있을 것이라 하였다. 지안은  재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재원을 마음에 들어 하면 할수록 재원의 분량은 줄어들었다. 신 피디는 점점 노골적으로 지안이 주호와 가까워지게 밀어붙였다.


  이쯤에서 신 피디는 내게 타협을 요구했다. 지안이 주호를 선택하게 해달라고 강하게 압력을 넣었다.


 나는 신 피디를 신뢰하였다. 처음부터 내내 신 피디를 믿고 따랐다. 그래서 신 피디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미처 지안을 배려하지 못했다. 지안이 재원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나로서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재원을 숨기기 급급했다. 그리고 주호의 매력을 부각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사실 신 피디와 나만 아는 비밀이 있었다.


사실 한주호는 가의 인물이었다. 신 피디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거짓 인물을 만들어 놓았다. 실제 한주호는 엘리트 경영인이 아닌 모델 지망생이었다. 여성 시청자들은 그 사실을 알고 폭발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란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한주호는 지안의 남자가 아닌 만인의 연인이 되는 거였다. 방송 말미에 반전 효과를 주어 시청률을 극대화시키고 성공적인 마무리를 짓고 나면 신 피디는 지안에게 정식으로 교제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이 모든 것이 결국에는 지안에게도 해피엔딩으로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지안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지안을 억지로 억압하고 선택을 강요하였다. 그럼에도 지안은 자꾸 재원을 찾았다. 지안이 알고 있는 재원에 대한 정보는 오직 사별한 수의사란 것밖에 없는데. 지안은 나도 모르게 내버려 둔 그날 밤의 시간 속에 애틋한 추억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내가 방심한 탓이 컸다.


 깊은 밤 풀장에 나가 지안과 재원이 선베드에 누워 별을 보며 했던 얘기들. 그 점은 나도 모르게 진행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 하나의 사건이 지안을 이렇게 혼란스럽게 할 줄은 몰랐다. 급기야 지안은 신 피디를 찾아가 재원과 사귀고 싶다고 고백하였다. 뜻밖의 고백에 신 피디는 당황했다. 설마 둘 중의 누군가를 좋아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반드시 주호였어야 했다. 신 피디는 알다시피 계획한 바가 있었다. 지안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신 피디는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그런 남자 만나면 개고생 한다고. 그야말로 개고생이라고.”


  지안은 결혼보다는 연애를 하고 싶다고 하였다. 신 피디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신 피디는 이쯤에서 지안에게 고백을 해야 하나 망설였지만 우선 촬영부터 끝내고 보자고 마음먹고 지안을 몰아쳤다.


  드디어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지안의 표정은 밝지는 않았지만, 무척 예뻤다. 최고로 예쁘게 옷을 입혔고 화장 역시 화사해 보였다. 지안은 신 피디의 강압에 못 이겨 주호를 선택하였다. 여러 가지 연출들로 인하여 재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둘을 축복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허탈해진 신 피디에 집중하느라 계속해서 지안을 신경 쓰지 못하였다. 신 피디의 고뇌와 자연스러운 폭로, 그리고 고백을 위해 적절한 묘사가 필요했던 것도 있었고. 신 피디의 알 수 없는 허탈함 같은 것을 공유하고자 했다. 나는 신 피디가 아니었지만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시간 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안이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것도 아닌 멈춘 상태로 지안은 소멸하여 갔다.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판타지를 대입시켜도 지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내가 의도치 않은 일이 생길 수 있던 것인지. 지안이 사랑한 재원은 그 시간 이후로 꼼짝도 안 하고 봉인된 상태인데 어째서 지안은 그런 재원을 잊지 못하고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곧 지안의 신이고 창조자였음에도 나는 지안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한순간에 재원도 사라지고 주호도 지안도 사라져 버렸다. 오직 신 피디만이 나와 함께 이 시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신 피디가 내게 물었다.


  “이 프로그램은 망한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신 피디에게 얘기했다. 이 소설은 망했다고. 이 소설은 세상에 읽히지 않을 것이라고. 신 피디는 좌절하였다. 내가 한 좌절보다 더 좌절한 것 같았다. 신 피디가 물었다.


  “그럼 저도 이제 사라지는 거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안을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 지안은 끝까지 살아남지 않았다. 지안이 왜 그 순간 소멸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재원도 주호도 어차피 내가 만든 소설 속 인물인데 유독 재원을 사랑한 까닭을 알 수 없다.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지안과 나는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지안을 달래고 다그치고 숱한 노력을 하였다. 나는 지안에게 물었다. 뭐가 그리 서운하고 원망스럽냐고. 지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가 지안의 과거를 다 알 수 없듯, 내가 모르고 지낸 지안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감추었다. 지안은 어쩌면 자신이 신 피디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한때 그와 결혼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자신의 운명이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던 걸까.

  그렇게 내 소설 속의 캐릭터들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소멸해 버렸다. 기약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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