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남편은 무정자증이었다. 꼭 그것 때문에 이혼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정적으로 진을 빠지게 했다. 사법고시 준비를 한답시고 일도 안 하고 돈도 벌지 못하는 남편의 무능함을 대신해 줄 유일한 희망이 아이였는데 그 한 가닥의 희망마저도 사라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미리부터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돈도 마르고 씨도 마른 남편과는 더 이상 살 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고문 같던 결혼 생활을 끝냈다. 그는 더 이상 나를 잡을 명분이 없었다.
이혼을 하고 5년 동안을 혼자서 지냈다. 5년 동안 내게 어울리는 남자를 물색하기도 했고 그동안 못 해봤던 일들도 겪으면서 지냈다. 남들 보기에는 조금 적적하고 안쓰러워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정작 나는 잘 지냈다. 조그만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방방곡곡 여행도 다녔고 학원 강사를 하면서 조금 모아둔 돈으로 주식 투자를 해서 소소한 이익도 챙겼다. 못 마신다고 생각했던 술은 조금씩 늘기 시작했고 어쩌다 가끔은 낮술을 마시기도 했다. 약간 알딸해진 기분을 갖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사람 많은 곳을 한적하게 걷는 기분은 마치 천국을 산책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소리는 먹먹하게 귀를 울리고 바닥은 가볍게 출렁거렸다. 나는 그 와중에도 꼿꼿하게 중심을 잡으려 기분 좋은 애를 썼고 그렇게 휘청거림 없이 잘도 걸어 다녔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 나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여자에겐 세상이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혼자 지내는 것도 익숙하고 재미있다고 생각되었을 즈음 내 몸에 꼭 맞는 남자를 만났다. 비록 나보다 스무 살이나 많았지만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건강한 남자였다. 무엇보다 아주 똑똑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초혼이었다. 무엇보다 전 남편에 비하여 돈도 많았고, 인물도 나았다. 속궁합도 잘 맞았다. 남편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열정적으로 내게 달려왔다. 그런 활발한 관계 탓일까. 나는 처음으로 임신이란 걸 하게 되었다. 내 몸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너무 벅차고, 두렵고, 용기가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남편은 물론이고, 엄마도 눈물을 흘리며 기뻐해주었다.
정기 모임에 가서 나는 친구들에게 임신 소식을 알렸다. 그들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표정을 밖으로 드러냈다.
"나이 먹어서 임신하면 위험한데."
"다 늙어서 무슨 임신이야. 그냥 둘이만 살지."
"애 낳으면 고생길 시작이야."
너무 뜻밖의 반응에 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이들은 나의 임신 소식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자기네들은 둘씩, 셋씩 , 적어도 하나 이상은 잘도 낳아 놓았으면서, 벌써 중학생, 고등학생도 되었으면서 뭐가 부럽고 시샘할 일이라고 나의 임신 소식을 기뻐해주지 않는 걸까. 순간 나는 서운함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친구들은 실컷 진을 빼놓는 걱정을 늘어놓더니 그제야 어깨를 토닥거린다.
"아무튼, 축하한다."
"이제 은하도 엄마가 되는구나." 하면서 자기네들 임신하던 에피소드며 아기 키우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 말들이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서운함이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윗배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모임에 나오기 전만 해도 내가 생각한 그림은 이런 게 아니었다. 다들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축하를 해주고 어떤 친구는 감격의 눈물을 지어 보이기도 하는 거였다. 친구들이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모습과 행복한 여인으로서 친구들의 애정 어린 관심과 보호를 받는 모습이었어야 했다.
그런데 현실은 노산에 대한 걱정과 우려에 부정적인 뉘앙스로 축하 아닌 경고 메시지를 보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저마다 노산의 위험성에 대해 얘기했고, 사례를 얘기했고, 아이 없이 둘만 사는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설득을 하기도 했다. 그나마 그런 임신에 대한 얘기도 잠깐이었고 다들 각자의 임신 경험을 얘기하며 푸념한 투였지만 각자의 경험에 취한 채 자신들의 거창한 임신부터 출산 과정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이젠 다 키워 놓은 자식들에 대한 무용함마저 얘기하며 그것 또한 자랑처럼 느껴지게 잘도 떠들어댔다.
나는 혼자 덩그러니 객석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주인공은 내가 아닌 그들이었다. 그들은 싸우듯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에 바빴다. 어느새 임신. 육아에 관한 이야기는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고 시집 얘기. 남편 얘기. 땅 얘기. 집 얘기. 주식 얘기. 코인 얘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계속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 위해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넣고 아랫입술을 깨문 상태로 애써 미소 짓고 있었다.
뒤늦게 지수가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동창이면 웬만하면 친해질 법도 할 텐데 지수와는 그러지 못했다. 지수는 명은이란 친구와 각별하게 친했었고 일부 다른 친구들과도 그런대로 친한 편이어서 우리의 모임에 어울리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20년 동안이나 이런 모임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면 지수와도 충분히 더 많이 친해질 시간이 있었겠지만 마땅히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 같다.
나는 각별하게 지내는 다른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명은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지수에게 나에 관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은하 임신 했대.”
그 서먹했던 친구 지수는 순간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눈을 터질 듯이 크게 뜨며 놀라고 환한 웃음으로 내게 축하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만이 진심으로 나의 임신 소식을 기뻐하고 있었다. 다들 고요하고 엄숙하게 그러면서 진지하게 재테크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 늦게 도착한 지수만 찬물을 끼얹듯 그들이 덮어두려 했던 임신 소식을 들추어냈다.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녀의 축하 메시지였다. 나는 그제야 깨문 입술을 풀었다.
"고마워."
그 순간 내가 지수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세상에 그토록 관심도 없던 이 친구가 나의 임신 소식을 이렇게 기쁘게 그것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있다니.
"정말 축하해. 은하야. 얼마 정도 된 거야?"
"8주 정도 되었다고..."
"태몽은 꿨고? 얼마 전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너에 관한 태몽이었나 봐. 어쩜 좋아."
세상에 이 친구는 어쩜 이렇게 내 마음에 쏙 드는 얘기만 해오는 걸까? 쓸쓸히 재미없는 공연을 관람하던 내가 갑자기 주인공이 되어 무대 위로 올라간 기분이 든 순간이었다.
지수는 '자 이제 당신의 얘기를 해보세요.' 하면서 내게 날개를 달아주고 있었다. 나는 신이 나서 지수에게 그동안 생각하고 벼르어 두었던 임신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지수의 눈은 이미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은 진심으로 빛이 나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친구가 찬물을 끼얹었다.
"우리 영화 볼 시간 다 됐다. 이제 일어나야 돼. 시간이 이렇게 간 줄 몰랐네."
나는 그래도 어떻게든 지수에게 얘기를 하려는 제스처를 보이는 데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나는 영화 보러 가는 짧은 거리만이라도 지수와 단둘이 걷고 싶었다. 그렇지만 난 한 번도 지수와 팔짱을 끼며 걸은 적이 없었다. 이제 와서 지수의 팔짱을 끼며 걸을 수는 없었다. 나는 경은이와 함께 걸었다. 경은이는 옆에서 내게 이죽거리는 염려를 해 주었다.
" 영화는 볼 수 있는 거지? 피곤하진 않지?"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경은이가 너무 얄미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예전에 나는 친구들이 임신할 때마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었다. 심지어 결혼 전 임신을 하고 걱정스럽게 유산하는 친구에게도 낳는 게 어떻겠냐고 만류했었다.
얼마 후 나는 그들의 저주 같은 우려대로 유산을 하고 말았다. 나이 43살에 임신한다는 것은 신계에 살고 있다는 유명 연예인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던가? 역시 사람들의 걱정대로 무리였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유산이 될 만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었다.
내게 처음 찾아온 생명은 내 안에서 엄지 손가락만 한 크기로 죽어버렸다. 나는 그 와중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다시 소생할 수는 없는 거냐고 의사에게 물었고 의사는 100퍼센트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얘기했다. 의사는 당장 긁어내지 않으면 안 좋다고 했지만 나는 조금 더 있어 보겠다며 병원을 나왔다. 배를 어루만지며 생명이 부활하길 기원했다. 죽은 화초도 다시 살아나는데 내 아기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지만 생명은 핏덩이가 되어 내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빨갛고 거무튀튀한 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차마 변기의 물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 안에서라도 살아나길 고대했다. 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살아나라는 철없는 주문을 외우다가 결국 포기하고 울어버렸다. 그것도 부끄러워 숨을 죽이고 울었다. 한참 후에 나는 밸브를 내렸다. 아기는 소용돌이 속에서 떠내려가고 있었다.
"미안하다 아가야. 미안하다. 못난 엄마 만나서 피어 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게 해서... 미안하다... 부디 더 좋은 엄마 만나서 다시 예쁘게 태어나렴....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제 내 자궁은 깨끗한 상태의 빈 방이 되어있었다. 아이가 거부한 방이었는지 엄마가 거부한 방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생명이 살기는 힘들었던 나의 방. 온기가 너무나 부족해서 무서웠던 것일까? 태어나서 생리를 단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고 날짜마저 아주 규칙적일 정도로 건강했는데. 문란한 성생활을 한 적도 없었고 몸에 나쁜 음식은 먹지도 않았었는데.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기 위해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남편도 훌륭했는데. 나에게 태어날 아기는 찬란한 미래가 보장될 수 있었는데. 왜 이런 호사를 마다했을까.
어릴 때 시골 할머니네 집에 가면 독특한 냄새가 났었다. 마치 고구마 뒤꼭지 같은 냄새 같았는데 다소 쓴 느낌도 나고 퀴퀴하고 토속적인 느낌이 나는 냄새였다. 점차 정겹게 그 냄새를 받아들이게는 되었지만 처음에는 코를 킁킁거리며 거부감이 들었었다. 인체에 아무런 해가 되지도 않았고 없앨 이유도 근원조차 제대로 못 찾던 그 냄새. 오직 할머니 집에서만 났던 그 냄새가 있었다. 어쩌면, 혹시 아기가 내 자궁에서 그런 냄새를 맡은 건 아니었을까? 아기가 엄마 방인 줄 알았는데 할머니 방으로 착각하고 떠나간 것은 아니었을까?
유산 이후로 나는 한동안 아기 꿈을 꾸었다. 아기가 기저귀만 찬 채 엉금엉금 우주를 기어가고 있는 꿈. 우주에서 웅크리고 자는 꿈. 그래 내 아기는 우주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직 새로운 엄마를 찾지 못하고 대기 발령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아기는 내 방을 찾아오지는 않았다. 아기는 그 시골 냄새나는 나의 빈방을 좋아하지 않았나 보다.
지인들이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던 나의 임신을, 유산을 하고 나니 무척 안타까운 표정으로 위로를 해 주고 있었다. 그 뒤로 모임에는 나간 적이 없지만 가끔씩 문자가 왔다. 괜찮냐며, 괜찮다며, 괜찮을 꺼라며, 나는 그럴수록 그들에 대한 원망만 깊이 쌓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