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고양이 사진을 들이밀었다. 나는 내 새끼만 예쁠 뿐이라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는 개의치 않고 다음 사진을 넘겼다. 불과 얼마 전까지 "사람 살기도 팍팍한데 개새끼는 키워서 뭐 하냐"고 혀를 찼던 위인이다. 그런 그가 털 뭉치 하나에 영혼을 판 집사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인간의 간사함이란 참으로 가볍기도 하지.
자기가 했던 말은 까맣게 잊은 양, 더불어 실업 급여를 받고 있다고 했다. 하는 일은 없고 실업 급여를 받고 있자니 귀찮은 일을 하고 싶었던 건가. 궁색 떠는 것도 여전했다. 명색이 아티스트랍시고 깝죽거리고 다니던 놈이 생계에 목을 매며 안달을 떠는 모습이 조금 역겨웠다.
우리는 알고 지낸 지 7년이 넘었다. 남녀 간의 화학적 반응이라고는 0.1g도 섞이지 않은, 주기율표 가장 구석에 박힌 비활성 기체 같은 사이. 그의 이름은 기윤이다. 이름만 들으면 세련된 도시 남자가 연상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나는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본 기억이 없다. 우리끼리는 늘 '야'로 통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룹마다 호칭을 다르게 부르는 것이 새삼스럽긴 하다. 어떤 그룹에서는 서로를 '유(you)'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이랑 있을 때 제삼자는 '그녀'로 지칭한다. 그녀가 말하길.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 따위로. 지금도 그 그룹에선 그렇게 쓰고 있다. 일종의 병신체를 구사하고 있는 셈인데. 주로 패션지 기자들이나 허세 돋는 직종에서 자주 사용하였다. 또 다른 그룹에선 주로 '년'으로 불렸다. 이년 저년 썅년 등. 그 그룹이 나름대로 친근감 있고 좋긴 했는데 개년들이 개를 너무 싫어해서 인연을 끊었다. 지 자식들만 중요한 년들이었다. '님'이라고 호칭을 쓰는 곳도 있었다. 무슨 님 무슨 님 하는데 오글거림 때문에 정신이 혼몽할 정도다. 어쩌다 실수로 '씨'라는 말이 나오면 허둥지둥 입을 때리고 '님'이라고 정정해서 불러야 했다. 씨는 그곳에서 상당히 예의 없는 호칭에 해당했다. 그곳은 누가 뭐라 한 사람도 없는데 괜히 주눅 들던 곳이었다. 대체로 인터넷 합평 모임이나 학문 연구소 같은 부류가 그랬다. 화기 돋게 웃다가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침묵하는 것을 변태처럼 즐기는 무리로 기억한다. 마지막으로 '그대'라고 부르는 그룹도 있었다. 나는 그분들께 한 번도 그대란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항상 나를 그대라고 불렀다. 그들은 사슴 피 먹는 곳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나를 '야'로 부르는 기윤이 그날은 머리에 흑채를 교묘하게 뿌리고 나왔다. 자기 딴에는 벗겨지기 시작한 이마 헤어라인 부근에 처발랐는데 마치 시커먼 거미줄이 얼기설기 뭉텅이 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내가 피식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는 눈치 못 챘고 수시로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흘끗거릴 뿐이었다. 나는 그의 완벽한 이마라인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저, 각을 떠 놓은 듯한 반듯한 헤어라인을 다듬느라 밤을 지새운 건 아닌지. 얼굴에 반사광이 보일 정도였다.
제멋에 사는 인간이니 뭐라 할 일은 아니다만. 저렇게 누가 봐도 티가 나는데 본인만 티가 안 난다고 자부하는 스타일에 넌지시 얘기라도 해줘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도 했다가 관뒀다. 일 년 전에도 가로수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그와 마주쳤는데 눈썹 문신한 모습을 보고 혹시나 해서 물어봤던 적이 있다. 그때 그가 나를 구석으로 몰고 가더니 일행들 앞에서 창피하게 무안을 줬다며, 저들은 알지도 못한다면서 광기를 부렸었다. 그러더니 돌아서 가는 등 뒤로 묻는 소리가 들렸다. "티나?" "그걸 말이라고." "어머, 어떡해. 제일 자연스럽다고 했는데. 계집애 누가 메이크업하는 애 아니랄까 봐 눈썰미 하고는. 그래도 다른 사람은 모를 거야."
이 지랄. 사람들이 모를 리가 있나. 그냥 모른 척하는 것이지. 나는 그 말을 직접 하지는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의 자존심을 일부러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경복궁역 근처 디저트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죄다 젊다고 의식하더니 자기만 늙었다고 투정을 부렸다. 나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바삭 빙수와 블루베리 요구르트를 주문했다. 남자나 여자나 자기 치장에 유독 공을 들이는 인간들은 남에게는 인색한 법이다. 저런 인간을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니다.
"날이 덥긴 진짜 덥다. 올해도 장마가 오다 말려나." "나라 꼴이 이 모양이니 하늘도 무심한 거지." 그놈의 나라 꼴 타령은. '니 꼴 관리나 잘해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만만한 게 나랏일이니까. 막상 자기도 공무원 시켜주고 국가 일 맡겨주면 독특하게 해낼 인간이면서. 애국심도 충성심도 독특하게 높을 인간이 괜한 부심은. 그래도 그런 얘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줄 알았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발생했다. 그가 또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고 난 뒤부터다.
"야, 여기 물이 왜 이러냐. 다들 촌스러워." 자기는 실업 급여받는 주제에, 흑채가 땀에 번질까 전전긍긍하는 주제에 남의 외모 품평은 청담동 원장님 수준이다. "너나 잘해. 요즘 덩치가 산만 해져가지고... 남들이 보면 성전환 수술한 형인 줄 알겠다." 그가 킬킬거렸다. 밥 두 공기 먹는 여자가 덩치가 좀 있다고 해서 트랜스젠더 취급이라니. 나는 숟가락을 꽉 쥐었다. 입속에 밥알이 모래처럼 씹혔다. 내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그는 알까. '사람들이 너더러 뭐 같다고 하는 줄 알아? 홍석천 이래.' 그의 하이톤 목소리, 과장된 제스처, 새침한 말투. 누구든 그를 한 번 보면 "아, 그 게이 같은 친구?"라고 기억한다.
나는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홍석천'이라는 단어를 삼켰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그가 좋아하는 '정보' 이야기로. "너 요즘 페북에서 정보 얻는다며?" "어. 거기가 뉴스보다 빨라. 트렌드를 읽어야지." "그래? 그럼 너 혹시 일베도 아니?" 순간, 빙수를 퍼먹던 그의 숟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미간이 맹렬하게 구겨졌다. "일베? 야, 너 그런데 들어가냐? 완전 쓰레기 소굴 아니야?" "아니, 내가 한다는 게 아니라. 요즘 트렌드가 그렇다고. 오유는 알아? 여시 같은 곳은?" "아, 몰라! 듣기 싫어. 됐어. 자고로 근묵자흑이라고 했어. 어딜 그런 천박한 사이트를 입에 올려? 아이 싫어." 그는 마치 오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몸서리를 쳤다. "아니, 진정하고 들어봐. 정보의 홍수 시대라며. 편협하게 보지 말고 다양한 곳을 알아야..." "편협? 니가 뭔데 나한테 편협하다는 말을 해? 내가 꽉 막혔다는 거야?"
갑자기 그가 귀를 틀어막았다. "아아악! 그만해! 듣기 싫어!" 카페 안의 모든 시선이 우리 테이블로 꽂혔다. 덩치는 산만 한 남자가, 유행이랍시고 밑단을 한 뼘이나 접어 입은 청바지를 입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앙탈을 부리고 있었다. "너 진짜 너무해. 나 머리 아파. 나 갈 거야!"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더니, 가방을 챙겨 후다닥 뛰쳐나갔다.
앙탈도 그런 앙탈은 눈 달리고 처음 봤다. 기윤은 대체 어느 시점에서 기분이 나빠진 걸까. 그러니까 내가, 내가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게 아니었다. 왜, 내 주위엔 저런 인간들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