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개념이 모호해진 미래의 어느 날.
마치 흔치 않은 배심원의 자격을 부여받기라도 한 것처럼 드디어 파니에게도 블루 스크린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설마 나한테까지 그런 행운이 오겠어? 하면서 체념했었는데 막상 당첨되고 나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블루 스크린은 시간 체험기로 자유롭게 시간을 넘나들 수 있는 일종의 시간 여행기계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계는 숱한 실험을 통해 부작용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고 일련의 임상 실험을 거친 후 세상에 출시되었다. 물론 항간에는 여전히 정부가 선심성 임상 실험을 하고 있다는 루머가 떠돌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무언가 그럴듯해 보이는 시스템 앞에서는 무릎을 꿇기 마련이라 대중은 정부의 정책을 신뢰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로또 당첨되는 일보다 블루 스크린이라는 시간 체험기에 당첨되는 일을 더 좋아했다. 그럴수록 정부는 엄격한 정책과 규제를 가했다. 정부가 선포하기를, 과도한 경험적 오류를 저지하기 위해 ‘판타지 연구소’란 상호를 걸고 이용 객수를 제한할 것이며 대신 공정하게 무작위 추첨으로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우주여행도 상속받은 재벌들끼리만 유행하는 터라 평범한 사람들은 꿈도 못 꾸던 일인데, 시간 여행이라는 추상적 관념 여행을 정부의 지원 아래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미래 시대 신복지 시스템이었다. 이마저도 다른 나라에서는 엄두도 못 내는 일이라고 정부는 잔뜩 생색에 선전을 하고 다녔다.
희소성이 있다는 것은 구미를 당기게 하는 매력이 있기에 너도 나도 당첨되길 희망했다. 하지만 막상 당첨이 되면 적잖은 사람들이 중도에 체험을 포기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현상 중 하나였다. 누구도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었다. 주변에 시간 체험기에 탑승했다는 사람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긴 주변에 우주여행을 하였다는 사람도 들어 번 적이 없는데 시간 체험을 한 사람을 만나기가 쉽진 않았겠지. 더군다나 시간 체험기는 일 년에 한두 번 12명 안팎으로 기회가 주어질 뿐인 데다 국가에서 워낙 평등 사회를 강조하는 터라 자랑 금지 태그를 여기저기에 붙여 둔 바람에 정보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시간 체험을 자랑 품목으로 두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그러잖아도 시민 건의함에 시간이나 우주 체험은 경험 품목으로 지정하자고 말이 많았다. 소유가 아닌 품목에 자랑까지 못하게 하는 건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시간 체험기에 관해선 왜곡된 정보들이 난무했다. 그 어떤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지만 확실한 정보 또한 없으니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 역시 믿을 수는 없지만 막상 당첨이 돼도 적잖은 사람들이 중도에 체험을 포기한다는 얘기가 돈 것이다. 무작위 추첨으로 당첨된 체험권을 받았을 때는 뛸 듯이 기뻐하다가도 정작 기계 앞에 서려니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두려움의 가장 큰 원인은 시간이 랜덤으로 작용하는 것 때문이다. 시간 체험기를 통해 죽는 일은 없지만 재수 없으면 원하지 않는 시간대로 돌아가서 인생을 다시 설계해야 할지도 몰라 서라나. 그렇다면 미래도 마찬가지겠지. 원론적으로 생각해 보면 시간 체험기를 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선택적 체험이 되어야 하는데 랜덤으로 배치된다는 건 인생을 너무 막살게 하는 게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돌아가게 한다거나, 현재의 도피 차원으로 미래를 선택하거나 해야 하는데 무작위 추첨에 무작위 시간 체험이라니. 그래서 항간에는 판타지 연구소란 간판을 붙였을 뿐, 사실은 인생 철학관이란 얘기가 들렸다.
누구나 시간 체험기를 경험하기 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고,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언지 숙고하게 된다나. 그러다 보면 과거를 뉘우치고 현재에 충실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져 체험권을 포기하게 되는 사례가 속출하는 거라고. 그도 일리가 있긴 한 것 같았다. 파니 역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강파니는 누구보다 호기심이 강했고 시간 체험을 원했다.
판타지 연구소는 정부의 삼엄한 감시와 운영체제로 가동됐다.
시간 체험기계 블루 스크린은 20분 동안 7.6킬로로 걷게 되어 있다. 흡사 러닝머신과 비슷한데 얼핏 봐도 러닝머신과 전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외형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파니는 막상 당첨이 되자 망설임이 앞섰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하여 블루 스크린 기계 위에 올라섰다. 그러자 여태 잠잠하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렇지. 파니의 얼굴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블루 스크린이 가져 올 결과는 막연하게 추측만 할 뿐인데도 그것은 진실보다 사실에 가까울 정도로 믿음이 갔다. 어떻게 확신도 없으면서 믿음이 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중의 심리라는 것이 그런 법이니. 왜 이토록 무모한 행동을 하려는 건지. 어쨌거나 정부에서 주최하는 것이기에 사기는 아닐 거란 막연한 믿음 때문일까.
짧은 시간 동안 파니는 많은 생각이 오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생각이 수시로 바뀌었다. 만약에 과거로 역행하게 된다면 어떡하지?
기계 앞에는 21세기 항공사 승무원 같은 복장을 한 도우미가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항간에는 그들이 인간이 아닌 단백질 로봇이란 말도 떠돌았다. 그럴 수도 있겠다. 간혹 싱글남의 자위행위용 단백질 인형이 버림받고 세상에 돌아다니는 일이 있는 것처럼 그토록 아름다운 여자들은 인간이 아닐 확률이 더 높은 것도 사실이다. 한때 과도한 성형 붐이 일던 시절 이후로 인간의 아이는 볼품없이 가능성 많은 얼굴로만 태어나지 않았던가. 꼬리뼈가 사라졌듯이, 사랑니가 없어졌듯이, 인간의 이목구비도 발달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퇴화된 지 오래다.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인간은 옷을 입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성형을 선택할 수 있었다. 결국, 그것은 인간에게 미각을 상실하듯 미인에 대한 개념도 상실하여 인간의 외모 따위는 관심도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
고서를 보면 역사를 바꾼 미인들도 숱하게 나오던데 현대인들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들도 있었구나 하며 웃어넘길 뿐이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미인의 무익함을 두고 그런 건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시대는 개들이 인간의 사랑을 받기 위해 점차 귀여운 모습으로 진화해 갔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인간 여성이 형체가 불분명한 모습으로 퇴화되어 간 사실에 관해서는 심각성을 못 느끼는 미인 불감증에 걸린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현대는 인간이,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이 왜 예뻐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었다. 예쁜 것은 죄다 애완용 동물이나 단백질 인형 혹은 로봇이면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파니 앞에 서 있는 도우미는 친절하고 잘 교육받은 표정과 말투로 설명하고 있었다. 아마 수 만 번도 더 반복했을 그 말.
"2021317님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 하여도 현재의 기억이 재생되진 않습니다."
파니 앞으로 부과된 번호는 2021317이었다. 시간 체험기 안에서만 불리는 이름이었다.
"기억이 재생되지 않는다고요?"
도우미는 다소 느린 반응 후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역시 단백질 인형이 맞았어.'
기억이 재생되지 않는다면 현재의 불운한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며 살아가게 될 확률이 높다는 거 아닌가. 파니는 순간 과거로 돌아가도 열심히 살 자신이 없다며 좌절했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떨까. 가까운 미래라 하여도 지금보다 나은 삶이라는 보장도 없이 불안하게 안착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미래로 간다 해도 더 노쇠한 몸으로 사는 것밖엔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파니는 애초에 기계에 올라타지 않고 돌아갔던 사람들과,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기계 위에 올라서자마자 포기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물론 어떤 이는 순전히 극심한 체력 저하 때문에 포기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들은 대체로 과도하게 육중한 거구이거나 말도 못 할 정도로 빈약하게 마른 체형이 대부분이어서 고작 이십 분도 못 버티고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주저앉거나 미끄러지고는 하였다.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체력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하다니.
7.6킬로의 속도는 블루 스크린이 탄생한 이후로 불변의 속도이다. 습관적으로 더 빨리 걷거나 뛰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그러나 7.6킬로의 속도는 보편적으로는 빨리 걷기에 적정한 수준이지만 경우에 따라 벅찰 수도, 더딜 수도 있는 모호한 속도였다.
파니는 몇 번이나 속도계를 조절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럴 때마다 도우미는 잘 훈련된 미소를 지으며 파니를 제지하였다. 이제 겨우 오 분을 걸었을 뿐인데 파니는 벌써부터 지루하고 지쳐갔다. 체력이 극도로 빈약한 것은 아니지만 평소 많이 걸어 다닌 일도 적었고 더군다나 이런 기계 위를 걸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파니는 유독 참을성이 부족했다. 현대인의 성향이 그러하듯 뭐든지 급했다. 빨리 먹고, 빨리 싸고, 빨리 자고, 모든 빨리 해내는 걸 자랑처럼 여겼다. 속도가 빠르면 시간은 더디게 간다는 아인슈타인의 영향 탓인지 매사 서두르는 경향이 짙었다. 그래서 파니에게 7.6킬로의 일정속도를 유지하며 걷는 일은 고욕이었다. 그런 사이 삼 분이 지나갔다. 이제 십칠 분만 있으면 시간 체험을 할 수 있다. 걸을수록, 피가 온몸에 빠른 속도로 돌수록 파니의 망설임이 고조되었다.
도우미는 마치 파니의 마음을 꿰뚫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십 분을 채우기 전에는 얼마든지 중도에 포기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블루 스크린에 도달하기만 하면 형언하기 어려운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형언하기 어려운이라.......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을 보니 단백질 인형이 틀림없군.'
파니는 조금 더 힘을 내어 블루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막연하고 막막하게 푸르기만 한 스크린이다.
'내가 저 안에 들어가게 된다니. 저곳에 무슨 일이 펼쳐질지도 모르는데. 과연 저곳으로 들어가도 되는 걸까. 그러다 우주를 먼지처럼 떠돌아다니게 되는 건 아닌지. 살아왔던 과거보다 더 험악하게 세상을 살게 되는 건 아닌지.'
파니는 점점 더 불안함을 느꼈다. 일렬횡대로 가지런히 들어선 기계 위에는 모두가 같은 속도로 시간 체험을 위해 걷고 있었다. 어떤 이는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고 어떤 이는 울기 직전으로 보였다. 죄를 짓고 서둘러 떠나는 사람처럼 보이는 이도 있었다. 7.6킬로의 속도로 걷는 것이 지나치게 벅차 보이는 노인의 모습도 보였다. 항암 수술을 받고 힘들게 올라서 걷고 있는 중년 여성도 보였다. 그러나 파니는 알고 있었다. 그들도 자신처럼 처음에는 무작정 하나의 목적만 생각하고 걷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또한, 자신처럼 수많은 생각이 오가고 있음을. 파니는 머리 위로 떠오르는 수많은 망상들이 후회인지, 불안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파니의 마음을 알아챈 도우미는 또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블루 스크린으로 가도, 이곳에서 멈추어도, 후회는 똑같이 발생하겠죠. 그러나 어차피 인생이란 건 그런 거 아닐까요. 이곳에서 사는 것과 그곳에서 사는 것이 별반 다르진 않겠죠.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결정을 하곤 하죠. 별반 다르지 않기에 도전을 멈추거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전을 해보거나."
파니는 그 말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도우미는 기계 보다 더 기계 같았다. 기계 옆에서 전혀 미동도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후추처럼 말을 곁들이는 일 외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우미는 파니에게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똑같은 말을 했으리라. 파니는 그런 단백질 인형 따위의 말에 현혹되어 판단을 유보하거나 번복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도우미의 얼굴을 보며 얕은 증오심마저 생겼다. 도우미 역시 말을 할 뿐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실제로 도우미는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고 기계 위를 걷는 인간에게 어떤 얘기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규칙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파니는 계속 앞만 보고 걸었다.
이제 십 분이 흘렀다. 파니에게 남은 시간은 십 분이다. 십 분 후엔 시공간이 달라진다. 물론 제로가 되어 현재에 남을 수도 있고 그럴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고는 했으나 파니의 예감에 제로는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제로가 되는 경우가 숱하다고는 들었어도 실제 제로가 되어 돌아온 사람은 들어 보질 못했기 때문이다. 제로가 되어 돌아온 수많은 사람들은 왜 그들의 경험을 떠벌리고 다니지 못했을까. 아니면 정말 제로가 소문처럼 흔한 일은 아니었던 게 아닐까. 파니는 자신이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이든 미래이든 어디로든 가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도우미는 점점 더 종잡기 어려운 신앙처럼 복잡한 위로를 하고 있었다. 파니가 시간 체험을 멈추어도, 진행해도 도우미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도우미는 오로지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할 뿐이었다. 파니가 7.6킬로미터의 속도를 중단하지 않고 20분을 채우게 되면 자연스럽게 블루 스크린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중지 버튼을 누르거나, 기계에서 내려오게 된다면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거다.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망설일 필요도 회피할 이유도, 구태여 명분을 만들 이유도.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든 시간에 억압당하는 순간에는 결정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어서 서휘는 불안한 감정이 백지처럼 확산되어 갔다. 선택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파니는 점점 숨이 가빴다. 7.6킬로미터로 이제 겨우 십 분을 조금 넘겼을 뿐이다.
팔 분 정도가 남았을 때, 파니는 선택을 하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가 없다. 화학적 반응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몸속을 맴도는 수액이 무모한 기질을 발휘했을 수도 있고, 벌써 고난이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이제 오 분이 남았다. 어린 소녀의 무모한 판단력만큼이나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결정 때문이었는지 파니는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고민의 깊이가 더해갔다. 몇 번이나 정지 버튼을 누를까 망설이기도 했으며 그럴 때마다 여전한 모습으로 보편적 후회를 만류하는 도우미의 온화한 표정이 기분 나쁘게 다가왔다. 현시대에 마지막으로 대면하는 도우미지만 파니는 여전히 도우미에게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적의는 계속되고 있었다. 도우미는 묵묵히 제 할 일만 하고 있을 뿐이었음에도.
블루 스크린으로 향하는 길이 결코 불운한 행보가 아님을 자각하면서도 파니는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 굴욕적 선택은 아니었나 싶기도 했고. 소용없는 도피에 대한 불안함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분이 남았다. 일 분이 남았다. 59초. 58초. 57초. 56초. 55초. 54초. 53초. 포기할 기회는 아직도 남아 있다.
파니의 몸이 움찔하였다. 도우미는 빈정대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도우미는 파니와의 작별을 기뻐하는 걸까. 파니는 일순 미궁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후회할 겨를도 없이 파니는 점점 블루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떻게 장막을 통과했는지도 모르게 불과 16인치밖에 되지 않는 블루 스크린 속으로 몸이 잘도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간 먹먹한 진공 상태가 지속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몸을 일으킬 수 없는 불편함에 꼼짝을 못 하였다.
'여기는 어딜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블루 스크린으로 들어갔을 때 파니는 줄곧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계속 떨어지다 어떤 낯선 땅에 두더지처럼 얼굴이 불쑥 솟아오르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러다 점차 광활하고 제약 없는 공간에 적응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파니는 손가락 끝의 감각을 느껴보기 위해 팔을 움직여 보았다. 마치 날개 짓을 하듯이 혹은 헤엄을 치듯이 창광 하였다.
어디선가 별처럼 반짝하며 점들이 보였다. 세상이란 점들의 집합체라고 하였는데, 이곳은 또 다른 세상의 입문이었던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을 받아 존재를 드러내는 먼지들이 하늘거리며 자신과 비슷한 형상의 물질로 보였다. 그러나 의지만큼 가까워질 수는 없었다.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내뱉을 수도 없었다. 아, 언제까지 이 공간에서 무의미하게 떠돌게 될까.
파니는 점점 속력을 내어 보려고 애썼다. 소용없는 일인 줄 알았지만 닿을 수 있는 한은 최대한 가까이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새로운 세상이란 마치 곤하게 잠을 자는 가운데 별안간 누군가 깨워 귀찮은 기분으로 일어나는 일과도 같은 거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듯 누군가는 재촉하지만 막상은 난처하다. 여기가 대체 어디란 말인가. 처음 대하는 낯선 곳인데도 지극히 일상적으로 보이는 조잡한 물체들. 파니는 드디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이 되었는지 알아차렸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일종의 사기 같은 걸 당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 이전과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까.
게다가 파니는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자신이 언제부터 이곳에 안착하게 되었는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문제가 발생했다는 거다.
그러니까 파니는 초성 'ㄷ'이 되어 있었다. 간헐적으로 전신을 두들겨 맞는 기분이 들었고. 그러다 한동안은 잠잠하기도 하면서.
‘ㄷ’이 된 서휘는 앞날을 예측할 수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 채 어쩌다 전신을 밀치듯 맞고 불편한 살닿음과 불필요한 만남을 가지며 난데없는 시공간에 안착하게 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폭락한 인생과 잃어버린 의식 속에서 얼마 동안을 버텨야 하는 걸까. 어떤 조용한 하루,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자욱한 먼지만 가득히 쌓여가던 날에 ‘ㄷ’은 용기를 내어 옆에 있는 초성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은 일종의 불평 같은 질문이기도 했다. 초성 ‘ㄱ’이었다. ‘ㄱ’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서 소리 없는 상류층처럼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ㅁ’과 ‘ㄹ’의 삶을 보지 못해서 하는 소리요. 그들은 이제 실체가 없어져가고 있다니까. 나처럼 적재적소에 쓰이면서도 폼나게 정상에 서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 뭐 당신 정도도 그다지 못한 삶은 아니잖소. "
“우리의 삶에도 끝이 있는 건가요?”
"상당히 철학적인 질문을 하는군요. 본래 ‘ㄷ’이 그런 편이기도 하지. ‘ㄷ’이 탄생시킨 단어들은 대체로 그렇기도 해. 뭐, 일일이 헤아릴 수는 없지만. 난 그저 막연히 짐작하고 있을 뿐이오. 나의 실체는 머지않아 없어질 테지만, 나를 대신할 존재는 얼마든지 즐비하겠죠."
"실체와 존재를 명확히 설명해 주실 순 없나요?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난 거랍니까."
"당신은 자신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요? 당신은 본래부터 존재했을 뿐이오. 이 세상은 그래요."
"나는 지금 나 자신이 몹시 불편합니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나는 이보다는 자유롭고 다양한 삶을 추구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이건 마치. 너무 수동적인, 정해진 삶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언제부터 이런 의구심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모습이 내 실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혹시라도 다른 이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나 해서."
"‘?’라는 친구가 그런 궁금함을 가득 담고 살았지. 그러나 그 친구는 함부로 멋대로 나설 수 없는 신분이니. 그 천한 바닥에서 감히 어찌 제 존재를 드러낼 수 있겠소. ‘! ’라면 모를까."
"저는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잠자코 있던 ‘ㅈ’이 관여를 했다.
"거참, 뜬금없이 왜 그런 거요. 여태 잠잠하더니. 무슨 악몽이라도 꾸었나 보군. 우린 이렇게 쓰이는 실체일 뿐이오. 괜한 상념에 젖지 말고 때를 기다리시오. 너무 한가하니 걱정을 사서하고 있군. 자, 이제 또 구타가 시작되었군요. 다들 열심히 자신을 뽐내 봅시다."
평소와 다름없이 ‘ㄷ’은 간헐적으로 툭툭 얻어맞았다. 사실 고통을 느끼진 못했지만 ‘ㄷ’은 언제부터인가 아팠다. 왜 그렇게 아픈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아팠다. 그리고 줄곧 궁금함이 생겼다. '대체 나는 어디서 왔단 말인가.'
"당신도 이름이란 게 있나요?"
"이름? 그것을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가 어떤 존재로 불려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가 원한 이름은 아니니까요. 당신은 혹 갖고 싶던 이름이 있던 거요?"
"적어도 'ㄷ'은 아닌 것 같아요. 미소나 2008 같은 숫자로 불렸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하죠. 그것도 꿈속에서만."
"당신은 꿈도 꾸나 보오."
'ㄱ'의 위엄과 자부심은 대단해 보였다. 초성 ‘ㄷ’은 종종 꿈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제가 자꾸 어딘가로 떨어졌어요. 줄곧 그렇게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꿈을 꾸곤 해요."
‘ㄱ’은 약간 졸음이 오는 것인지 ‘ㄷ’의 말에 몰입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경청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공중에서 그렇게 발을 허우적거리며 떨어지는 기분을 그토록 오래 느끼고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오직 저 하나뿐이라는 공포가 밀려오면서 이대로 가다간 가루처럼 부서져서 존재라고는 흔적을 찾기도 어려울 것 같단 말이죠."
"가만있어 보자. 발을 허우적거린다고? 꿈에선 발도 달려 있는가 보우. 마치 인간들이 날개가 달려 날아다니는 꿈속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구려. 일종의 스트레스 같군. 일 없을 때 푹 쉬어 둬요. 아니면 팔자가 너무 노곤해서 찾아오는 우울증 같은 것 일수도 있으니."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어쩌면 언제까지고 이렇게 끝도 없는 방랑을 계속해야 하는 건 아닌가. 생이란 게 그렇게 규정된 것처럼 이것이 본연의 삶이 아니었을까 싶은, 어딘가에 안착하다 또다시 정처 없이 떠도는 삶.
가끔 꿈에 나오는 일련의 사건들은 홀로 막연하게 추락하는 외로움을 달래보고자 스스로 지어낸 기억들이었던 가. 본래 자신은 형체가 없는 무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체념하며 ‘ㄷ’은 점차 제약 없는 공간에 적응해 가고 있는 듯싶었다. 초성 'ㄷ'은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듯 명료해졌다. 본디 이곳이 자신이 존재할 자리었음을 인정했다. 곧이어 수많은 허구가 어딘가로 떨어질 것이다. 하나씩 둘씩....... 혹은 세상 위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이곳의 분자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장난 같은 허상에 불과한지도. 비로소 ‘ㄷ’은 웃음이 났다.
"아무래도 자네는 너무 생각이 많은 거 같군. 그런 불필요한 잡념 따위는 이제 거두라고."
초성 ‘ㄷ’을 스쳐가는 저 수많은 검은 인간들. ‘ ㄷ’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빠져 들었다. 기억을 찾는 일이 시급하다. 꿈은 답을 알고 있다. 꿈은 나의 모든 것을 설계하고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꿈의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 어쩌면 알기 두려운 것은 아닐까. 지나치게 미래를 예언하는 건 현재로선 불길하다.
"아니 왜, 하나의 존재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뭐야. 또 무슨 뚱딴지같은. 저기 또 머리 검은 것들이 오고 있네. 이젠 일 할 시간이야. 자네, 정말 안 되겠구먼."
"세상에 초성 ‘ㄷ’이 저 하나뿐이겠느냐고요."
"하나뿐이지 그럼. 자네가 소멸하지 않는 한 하나의 존재로서만 존재하는 거야. 거 참 귀찮게 하는구먼. 요즘 신종 바이러슨가 뭔가 떠돈다는데 자네 혹시 바이러스 먹은 거 아닌가 모르겠네. 어허, 그러다 우리 몽땅 병원 신세 지게 하면 곤란하네. 얼른 자가 치유를 하도록 하게. 뚱딴지같은 소리 그만하고."
그 뒤부터 초성 ‘ㄷ’은 지랄발광을 했다. 그러더니 끝내는 컴퓨터에 블루 스크린이 뜨게 만들어 버렸다. 소멸해 가는 ‘ㄷ’만이 기뻐하였다. 다른 기호들은 푸른 물을 잔뜩 들이마시면서 ‘ㄷ’에게 한탄했다.
"애초에 미치광이는 싹을 잘랐어야 했는데. 우리까지 이게 뭐야."
‘ㄷ’은 옅은 미소를 띠면서 그들을 위로했다.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우린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어요. 혹 알아요? 우리도 검은 짐승이 되어 살지를?”
"미친, 삽질하는 소리 하는 것 좀 보게. 돌아도 단단히 돌았어. 이봐. 블루 스크린이 뜨면 더 이상은 회생 불가라고. 난 여태 이렇게 망가진 컴퓨터가 되살아났다는 소문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초성 ‘ㄷ’은 피식피식 웃기만 하였다. ㄷ은 눈을 감았다. 파바박 팟. 찌릿찌릿한 전율을 느꼈다. 점차 어떻게 타 들어가는지, 어떻게 소멸하는지, 기억을 망각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