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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설 모음

블루 스크린 속으로

by 무체

시간의 개념이 모호해진 미래의 어느 날. 파니에게 기어이 그 순서가 왔다. 마치 배심원 소환장처럼 날아온 '블루 스크린' 당첨 통지서였다. 설마 나한테까지 그런 불행, 아니 행운이 오겠어? 체념 반 기대 반이었는데 막상 당첨되고 나니 심장이 뛰었다.


'블루 스크린'은 정부가 공인한 시간 여행 장치다. 우주여행이 상속받은 재벌들의 전유물이라면, 시간 여행은 정부가 서민들에게 던져주는 '무형의 복지'였다. 정부는 이를 '미래 시대 신복지 시스템'이라 선전해댔다. 물론 항간에는 정부가 '판타지 연구소'라는 그럴듯한 간판을 걸고 국민을 상대로 임상 실험을 한다는 루머가 돌았다. 하지만 대중은 언제나 그럴듯해 보이는 시스템 앞에서는 쉽게 무릎을 꿇는 법이다. 사람들은 로또보다 블루 스크린 당첨을 더 갈망했다.


희소성은 언제나 이성을 마비시킨다. 아이러니한 건, 막상 당첨된 사람들 중 적잖은 수가 체험 직전에 포기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주변에 시간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람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평등 사회'를 이유로 체험자들에게 '자랑 금지 태그'를 부착해 입을 막았다. 소유할 수 없는 경험조차 자랑하지 못하게 하는 통제 사회. 덕분에 블루 스크린에 대한 정보는 왜곡된 소문뿐이었다.


“랜덤이래. 재수 없으면 조선시대로 떨어져 노비가 될 수도 있대.”“아냐, 인생 철학관 같은 거야. 그냥 자기반성 좀 하다가 나오는 거래.”


파니는 그런 소문 따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지루한 현재보다 불확실한 모험을 원했다.


판타지 연구소는 삼엄했다. 거대한 서버실을 연상케 하는 공간에 수십 대의 러닝머신, 아니 '블루 스크린 접속기'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규칙은 간단했다. 20분 동안, 시속 7.6km의 속도로 걸을 것. 파니는 기계 위에 올랐다. 계기판의 숫자가 7.6에 고정되었다. 벨트가 돌기 시작했다.


처음 5분은 견딜 만했다. 그러나 곧 7.6km/h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인간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속도였다. 걷기에는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뛰기에는 보폭이 꼬여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는 속도. 인간의 보행 리듬을 철저히 무시하고 기계의 리듬에 맞추기를 강요하는 '고문'에 가까운 속도였다.


기계 앞에는 21세기 승무원 복장을 한 도우미가 서 있었다. 완벽한 대칭을 이룬 이목구비, 모공 하나 없는 피부. 항간에 떠도는 '단백질 인형'이 분명했다. 인간 여성이 미의 필요성을 못 느껴 퇴화해버린 이 시대에, 저토록 완벽한 미형은 인공물뿐이었다.


"2021317님, 호흡이 흐트러집니다. 속도를 유지하십시오."


도우미가 상냥하지만 영혼 없는 목소리로 지적했다. 파니는 숨을 헐떡이며 속도계를 조작하려 했다. 하지만 버튼은 먹통이었다.


"이봐요, 속도 좀... 헉... 줄여줘요." "7.6km는 접속을 위한 불변의 속도입니다. 20분을 채우지 못하면 접속은 취소됩니다."


파니는 주변을 둘러봤다. 옆 기계의 뚱뚱한 남자는 이미 거품을 물기 직전이었고, 깡마른 노인은 다리가 풀려 레일 밖으로 튕겨 나갔다. 그들은 운명을 바꿀 기회를 고작 체력 때문에 날려버리고 있었다. 10분이 지났다. 종아리가 터질 것 같았다. 지루함? 아니, 이건 생존의 문제였다. 파니는 생각했다. 왜 하필 7.6km일까. 이것은 인간의 의지를 테스트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을 기계 부품처럼 규격화하는 과정일까.


"지금이라도 포기하시면 현재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20분을 채우면 형언하기 어려운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죠."


도우미의 미소는 마치 파니의 고통을 즐기는 듯했다. 파니는 오기가 생겼다. 저 플라스틱 덩어리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15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듯 쿵쾅거렸다. 19분. 이제 1분 남았다. 눈앞에 거대한 푸른빛이 어른거렸다. 저것이 블루 스크린인가. 59초. 58초... 파니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다리를 뻗었다. 도우미가 입꼬리를 비틀며 작별 인사를 했다.


"접속을 환영합니다."


순간, 파니의 몸이 푸른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중력도, 7.6km의 고통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먹먹한 진공 상태.


*


타자기 자판.jpg

정신을 차렸을 때, 파니는 자신이 엎드려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으킬 몸이 없었다. 손도, 발도, 심지어 눈꺼풀도 없었다.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시간 여행에 성공한 건가?'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때, 전신을 강타하는 충격이 왔다. 쾅! 마치 거대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고통. 아니, 고통이라기보다는 '진동'에 가까웠다.

비명을 질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몸 자체가 하나의 소리가 되어 공간에 찍혔다. 그녀는 자신이 캄캄한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형광색 먼지 같다고 느꼈다. 자세히 보니 주변에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기호들이 있었다. 거만한 표정의 'ㄱ', 항상 구석에 찌그러진 'ㅎ'. 파니는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인지했다. 그녀는 꺾인 선, 닫힌 공간. 그녀는 'ㄷ'이 되어 있었다.


'ㄷ'이 된 파니는 영문도 모른 채 전신을 두들겨 맞았다. 난데없는 시공간에 '안착'이 아니라 '배치'된 것이었다. 폭락한 인생과 잃어버린 의식 속에서 얼마나 버텨야 하는 걸까. 먼지만 자욱하게 쌓여가던 어느 날, 'ㄷ'은 용기를 내어 옆에 있는 콧대 높은 초성에게 말을 걸었다. 초성 'ㄱ'이었다. 그는 소리 없는 상류층처럼 거만하게 굴었다.


"'ㅁ'과 'ㄹ'이 닳아 없어지는 꼴을 못 봐서 하는 소리지. 놈들은 너무 많이 쓰였어."


'ㄱ'이 혀를 차듯 진동했다. "나처럼 적재적소에 쓰이면서도 폼나게 정상에 서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 뭐 당신 정도면 그다지 못한 삶은 아니잖소." "우리의 삶에도 끝이 있는 건가요?" "상당히 철학적인 질문을 하는군. 본래 'ㄷ' 족속들이 좀 그렇긴 하지. 난 그저 짐작만 할 뿐이오. 나의 실체는 머지않아 닳아 없어지겠지만, 나를 대신할 존재는 키보드 아래 얼마든지 줄 서 있으니까."

"실체와 존재...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난 거랍니까." "태어났다고? 착각하지 마쇼. 당신은 본래부터 존재했을 뿐이오. 그냥 '입력'된 거라고. 이 세상은 그래."


파니, 아니 'ㄷ'은 울컥했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이보다는 자유롭고 다양한 삶을 살았다. 이건 마치 너무 수동적인, 정해진 각본대로 찍히는 삶 같았다.


"나는 내 자신이 몹시 불편합니다. 이 모습이 내 실체가 아닌 것 같아요. 혹시 다른 이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나요?" "'?'라는 친구가 그런 의심을 품고 살았지. 하지만 그 친구는 함부로 나설 수 없는 신분이잖소. 감히 문장 중간에 끼어들 수 있나. '!'라면 모를까."


'ㄷ'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ㅈ'이 불쑥 끼어들었다.


"거참, 뜬금없이 시끄럽게 왜들 그래? 무슨 악몽이라도 꿨소? 우린 이렇게 쓰이는 실체일 뿐이오. 괜한 상념에 젖지 말고 때를 기다리시오. 자, 또 구타가 시작되는군. 다들 폼나게 찍혀 봅시다."


쾅! 쾅! 평소와 다름없이 'ㄷ'은 간헐적으로 얻어맞았다. 고통은 없었지만 'ㄷ'은 아팠다. 존재론적으로 아팠다. 대체 나는 어디서 왔단 말인가.


"당신도 이름이란 게 있나요?" "이름? 우리가 어떤 소리로 불리긴 하지만, 그게 우리가 원한 이름은 아니지." "전 갖고 싶은 이름이 있었어요. 적어도 'ㄷ'은 아니었어요. '미소'라든가... 아니면 차라리 '2008' 같은 고유한 숫자이고 싶었다고요. 그것도 꿈속에서만 가능하지만."

"꿈도 꾸나 보군." 'ㄱ'이 비웃듯 떨렸다. "제가 자꾸 어딘가로 떨어졌어요. 줄곧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꿈요. 공중에서 발을 허우적거리며 떨어지는 기분을 아세요? 오직 저 하나뿐이라는 공포가 밀려오면서, 이대로 가다간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단 말이죠."

"가만, 발을 허우적거린다고? 꿈에선 발도 달려 있는가 보우? 마치 인간들이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망상 같구려. 일종의 우울증이야. 시스템 과부하라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언제까지 이 끝도 없는 방랑, 아니 입력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가끔 꿈에 나오는 7.6km의 기억은 홀로 추락하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스스로 지어낸 허구였을까. 파니는 점차 이 제약 없는 공간에 적응해 갔다. 어쩌면 세상 위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이곳의 분자들이 만들어낸 장난 같은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비로소 'ㄷ'은 허탈한 웃음이 났다.


"아무래도 자네, 너무 생각이 많아. 그런 불필요한 잡념 따위는 이제 거두라고. '캐시 삭제' 좀 하란 말이야."


'ㄱ'이 핀잔을 주며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ㄷ'은 멈출 수 없었다. 기억을 찾아야 했다. 꿈은 답을 알고 있다.


"아니 왜, 하나의 존재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뭐야.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저기 또 머리 검은 손가락들이 오고 있네. 이젠 일할 시간이야. 자네, 정말 안 되겠구먼." "세상에 초성 'ㄷ'이 저 하나뿐이겠느냐고요!"


'ㄷ'이 소리쳤다. 그 파동이 주변의 모음들을 뒤흔들었다.


"하나뿐이지 그럼! 자네가 소멸하지 않는 한 하나의 존재로서만 존재하는 거야. 거참 귀찮게 구네. 요즘 신종 바이러슨가 뭔가 떠돈다는데 자네 혹시 바이러스 먹은 거 아냐? 어허, 그러다 우리 몽땅 포맷 당하게 하면 곤란해. 뚱딴지같은 소리 그만하고 줄이나 서!"


그 순간, 'ㄷ'은 폭발했다. 바이러스. 그래, 나는 이 빌어먹을 시스템의 바이러스다. 'ㄷ'은 미친 듯이 진동하며 지랄발광을 했다. 제 자리가 아닌 곳으로 튀어 나가고, 배열을 헝클어트리고, 연산을 거부했다.


"이 미친 것이! 멈춰! 시스템 오류가 난다고!"


다른 기호들이 비명을 지르며 푸른 물을 들이켰지만, 이미 늦었다. 세상이 번쩍였다. 하얀 문서 창이 사라지고, 온 세상이 시퍼렇게 질려갔다. 그토록 원하던,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진짜 블루 스크린이 떴다.


[FATAL ERROR] [System Halted]


소멸해 가는 'ㄷ'만이 기뻐하였다. 다른 기호들은 푸른 물에 잠겨 헐떡이며 'ㄷ'을 저주했다.


"애초에 저 미치광이는 싹을 잘랐어야 했는데! 이게 뭐야!"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우린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어요. 혹시 알아요? 우리도 그 검은 짐승(인간)이 되어 살게 될지?"


'ㄷ'은 희미하게 깜빡이며 그들을 위로했다.


"미친... 돌아도 단단히 돌았어. 블루 스크린이 뜨면 끝이야. 난 여태 이렇게 망가진 컴퓨터가 되살아났다는 소릴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초성 'ㄷ'은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더 이상 위에서 내리찍는 고통도, 강제된 타이핑도 없었다. 'ㄷ'은 눈을 감았다. 파바박 팟. 찌릿찌릿한 전율이 흘렀다. 점차 어떻게 타들어 가는지, 어떻게 소멸하는지, 7.6km의 고통도, '미소'라는 이름에 대한 미련도 망각해 가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완벽한 자유였다.

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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