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미인 saga

팩토리의 여왕 에디 세즈윅

by 무체

에디 세즈윅은 섹스와 마약의 영향에 두려움을 느낀 부모들에게는 혐오스러운 존재였고, 자유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이상적인 아이콘이었다. 아티스트들에게 그녀는 살아있는 예술 작품이었다. 부유하고 아름답게 태어났지만 정신적 문제와 가정환경으로 인해 그녀의 삶은 비극으로 치달았다. 앤디 워홀의 뮤즈로서 60년대 문화에 강한 영향을 미쳤으나,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약물 중독으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패셔니스타였다.

비록 강렬하고 짧은 생을 살았지만, 에디 세즈윅은 앤디 워홀에게 가장 소중하고 중요시 여겼던 뮤즈였으며, 그녀의 유산은 지금도 새로운 모습으로 재해석되어 현재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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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세즈윅은 1943년 4월 10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 바바라에서 부유한 상류층 집안의 7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대학 창설자, 권리장전 선언에 참여한 역사가, 독립선언문 서명자 등 미국 건국에 공헌한 명문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가문의 명성 뒤에는 정신병을 앓는 부모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에디 아버지는 하버드 경영대학원까지 졸업하고 철도 재벌이 되려고 했으나 정신건강 문제로 신경쇠약 진단을 받아 꿈이 좌절되었다. 그는 의사들의 조언에 따라 조각에 집중하면서 아티스트로 살았다. 한편, 그녀의 어머니는 심각한 대인기피증이었고 남편을 지나칠 정도로 사랑했다. 의사들은 이 부부에게 아이를 낳지 말 것을 권했으나, 본능에 충실했던 그들은 15년 동안 8명의 아이를 낳았다.


부모는 아이들을 낳는 데만 집중했고, 양육은 유모와 가정교사에게 맡겼다. 아버지는 에디가 태어날 무렵부터 수없이 외도를 일삼았다. 에디는 가족이 소유한 캘리포니아 대목장에서 자랐는데, 아버지는 자녀들을 목장 내 사립학교에서 자신이 승인한 커리큘럼으로 교육시켰다. 이런 비정상적 교육으로 인해 자녀들이 사회에 나왔을 때 적응하지 못했다.

에디는 13세에 샌프란시스코 근처 브랜든 기숙학교에 입학했으나, 거식증으로 1958년에 자퇴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부모는 가혹했고, 아버지의 외도 장면을 목격한 그녀는 아버지에게 폭행당하기까지 했다. 상태가 악화된 에디는 1962년 뉴 캐년의 실버 힐 병원에 입원했다. 그녀는 병원의 규율이 엄격하지 않아 친구들과 외출하며 시간을 보냈으나, 가족에게 발각되어 더 폐쇄적인 병동으로 옮겨졌다. 치료 후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했고, 어떤 하버드 대학생과의 짧은 만남 후 임신했으나 어머니의 도움으로 낙태했다.


1963년 말, 그녀는 매사추세츠 캠브릿지로 이사해 사촌과 미술 공부를 했고 여러 파티에 참석하며 활발한 사회생활을 했다. 에디의 가족 역시 문제가 많았다. 둘째 오빠 프랜시스는 10대부터 마약과 알코올 중독이었고, 자신이 게이임을 아버지에게 고백한 후 1963년 5월, 26세 생일 직전 병원 화장실에서 자살했다. 18개월 후, 정신건강 문제가 있던 큰 오빠도 오토바이 사고로 31세에 사망했다.


1964년, 에디는 모델이 되고자 재즈 발레를 공부하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파티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춤 실력보다는 독특한 패션 스타일로 주목받았다. 불편한 바지 대신 불투명한 검스나 망사 스타킹만 신고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이 '팬츠리스 룩'의 시초가 되었다.


래드클리프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에디는 1965년 3월, 당시 팝 아트 운동의 대표주자였던 앤디 워홀을 만났다. 워홀은 그녀를 영화 '말'(1965)과 '비닐'(1965)에 출연시켰고, "팩토리의 여왕으로 만들겠다"라고 공언했다. 이후 에디는 워홀의 '팩토리' 아트그룹의 공식 일원으로서 총 18편의 단편영화에 출연하며 미국의 '잇 걸'로 부상했다. 워홀은 에디의 실제 생활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었지만, 금전적 보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 시기 에디는 인기가 절정에 달했고, 뉴욕의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팜므파탈'이란 노래를 작곡할 정도로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밥 딜런의 로드 매니저였던 밥 뉴워스와도 관계를 맺었고, 밥 딜런과도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1966년 밥 딜런이 사라 론스와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소식을 앤디 워홀로부터 전해 듣고 비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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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단순히 작품만을 위한 피사체라고 느낀 에디는 결국 앤디를 떠났고, 둘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틀어졌다. 워홀은 자신을 떠난 그녀에 대한 질투와 배신감으로 대중적으로 그녀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동성애자로 알려진 워홀의 인생에서 에디는 유일무이한 여인이었다.


마약 중독으로 재활시설을 전전하던 에디는 1971년 8살 연하의 마이클 포스트와 결혼해 잠시 안정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16일, 산타바바라에서 열린 패션쇼 파티에 참석한 후,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파티에서 누군가 그녀를 헤로인 중독자라고 몰아붙여 쫓기듯 집으로 돌아와 의사가 처방한 약을 과다 복용한 것이다. 사인은 바르비투르산염 중독이었으며, 그녀의 나이 2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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