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탑스타 애나 니콜 스미스는 진 할로우와 메릴린 먼로의 섹시미와 백치미를 잇는 스타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그녀의 명성은 인기보다는 악명에 더 가까웠고 경악스러운 사생활 특히 60살 이상 나이차가 나는 억만장자와의 결혼과 약물 중독 등으로 피곤하고 불행한 인생을 살다 갔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분명한 꿈이 있었고 결국 그녀가 원하던 모든 꿈을 이루었다. 그녀의 꿈 리스트로 먼저 가슴 성형과, 돈을 많이 버는 것, 그리고 유명해지는 것과 아들을 낳고 딸을 낳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꿈을 이룬 결과는 행복하지 못했다.
애나 니콜 스미스는 무식하고 경박했지만 그녀가 클라우디아 쉬퍼의 뒤를 이어 활동한 게스 광고 화보 사진은 역대급으로 아름답고 섹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애나 니콜 스미스는 텍사스의 소도시 머헤이아에서 1967년 11월 28일 엄마 버지와 아빠 도날드 사이에서 비키 린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애나의 엄마 직업은 경찰이었고 아빠는 한량이었다. 이미 그녀 엄마에게는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있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어릴 때 엄마의 10살 된 어린 여동생을 강간하여 유죄를 선고받고 이혼하였다. 그 후로 애나의 엄마는 네 번 더 결혼하고 두 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공부를 잘할 턱이 없던 애나는 고교 1학년 때 낙제를 한 후 그 길로 학교를 중퇴하고 짐 크리스피 프라이드치킨집에서 일하였다. 애나는 예뻤고 어린 시절부터 메릴린 먼로를 흠모하여 그녀를 흉내 내는 것을 좋아한 끼쟁이였지만 납작한 가슴에 통통한 체형 그리고 예쁘지 않은 머리색상이 콤플렉스였다. 그러니까 도저히 모델이나 배우를 할 수 있는 외모까지는 될 수 없었다. 그녀는 식당에서 4년 동안 일했고 치킨집 요리사 빌리를 만나 1985년에 결혼하였다. 다음 해 그녀는 아들 다니엘을 낳았고 몇 달 후 남편의 집요한 구속을 이유로 집을 나왔다.
돌싱맘이 된 그녀는 아이를 친정엄마에게 맡기며 월마트와 랍스터 식당 등에서 억척스럽게 일했다. 그러나 석유 개발로 돈이 많이 돌던 휴스턴에서 스트립 댄서로 일하는 것은 월마트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녀는 소위 옷을 벗고 봉춤을 추면서 술을 팔고 팁을 받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애나는 춤은 못 췄지만 타고난 관능미로 인기가 많았다.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은 그녀는 첫 번째 꿈인 가슴 성형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180센티 미터나 되는 그녀는 자신이 수술만 받으면 모델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통 크게 한 번에 42dd 사이즈로 수술하였다. 수술 후 애나 인생이 순식간에 바뀐 것은 결과적으로는 행운보다는 재앙에 가까웠지만 적어도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꿈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유방확대술은 너무 아팠고 그녀는 그때부터 자낙스를 비롯한 다량의 진통제들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1991년 그녀는 자신의 가장 큰 꿈을 이루어줄 수 있는 억만장자와 사랑에 빠졌다. 젊은 시절에는 잘 나가고 인물도 좋았던 억만장자 J 하워드 마샬은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명사였다. 그에게는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이 있었고 이후 30년 넘게 사이좋게 지내던 두 번째 부인이 사망하자 낙심하여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애나의 소문을 들은 것인지 스트립 클럽에서 춤을 추며 홀라당 벗은 애나의 가슴을 보고 생의 의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쭈글쭈글한 얼굴엔 검버섯이 핀 상태에서 휠체어를 타고 있던 마샬은 애나를 자리로 불렀고 그녀에게 나 때는 말이야 스킬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친절히 그의 말을 들어주던 애나는 이제 일하러 가야 한다고 말하니 하워드는 그녀에게 100달러짜리 10장이 들어있는 봉투를 건네며 일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아가씨라고 말했다.
마샬은 주름 가득한 얼굴에 미소를 담고 그녀에게 다시는 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 뒤부터 애나에게 돈 쓰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며 집도 사주고 빨간색 벤츠 컨버터블을 사주고 해리 윈스턴으로 데려가 이백만 달러 이상의 보석을 사주었다.
86세의 왕자님을 만난 그녀 나이는 겨우 23살이었다.
마샬은 애나에게 몇 번이나 결혼을 하자고 했지만 애나는 남들이 자신을 돈만 보고 결혼하려는 여자로 알 거라며 자신이 유명해질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마샬더러 나를 스타로 만들어 달란 소리였다.
어쨌든 그녀에게 행운은 연속으로 터졌다. 1992년 애나는 자신이 꿈의 잡지라고 했던 플레이보이지의 플레이메이트가 되었다. 이에 더해 잡지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게스 브랜드 사장은 애나를 즉시 섭외하였다. 억만장자를 만난 스트립댄서가 대중 스타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마샬과 애나는 약 3년의 연애를 지속하였고 마샬 할배는 1994년 봄에 그녀와 그녀 아들을 평생 돌보겠다며 약속하면서 자신의 전재산 중 반을 주겠다며 청혼하여 애나는 수락하였고 6월에 결혼식을 치르게 된다.
역사상 가장 비참해 보이는 결혼식이었다.
결혼식은 어찌어찌 치렀지만 애나는 그의 곁에 머물기를 꺼려하고 식이 끝난 후 건장한 경호원과 도망치듯 식장을 빠져나갔다. 마샬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녀에게 전화하였지만 그녀는 거의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아갔다. 하루는 마샬이 운전기사에게 자신을 애나가 누워있는 침대에 던져 놓고 가라고 했지만 애나는 한 침대에서 자면 마샬이 오줌을 싸서 잠을 잘 수 없다고 하면서 내쫓았다. 이런 마샬에게 크리스마스는 더 악몽 같았다. 마샬은 그녀를 위해 커다란 에메랄드 펜던트를 쓴 테디 베어를 선물했지만 애나는 마샬에게 코털 제거기를 선물했다. 그 와중에도 외출 핑계로 나갔고 마샬은 폭우 속에 문밖을 서성이며 있다 폐렴으로 텍사스로 돌아가야 했다.
여전히 몸이 성치 않은 가운데 의사는 그녀에게 튜브를 통해서만 음식을 섭취하라고 했건만 새해에 애나는 그를 방문했고 굳이 닭 육수를 숟가락으로 떠먹이며 밤새 그를 괴롭혔다. 하워드는 다시 병원에 입원하였고 그가 퇴원했을 때 애나는 녹음기를 한 손에 들고 자신의 가슴에 하워드의 얼굴을 묻고 자신과 아들을 돌보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하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말귀도 못 알아 들었다.
결국 마샬은 그녀와 결혼한 지 1년 후인 1995년 8월 4일 사망했다. 그의 사후 애나 니콜 스미스는 더욱 끔찍한 곤경에 빠졌고 재정적으로 심각한 위험에 빠졌다. 게다가 마샬의 아들 피어스의 방해로 하워드의 유언장에 그녀를 위한 지분은 한 푼도 없었다.
마샬의 죽음 후 피어스와 애나 니콜 스미스와는 재산 분쟁으로 법적 다툼이 있었고 이 소송은 십 년 넘게 지속되었다. 그밖에 법정 소송이 한 두 건이 아니었다. 하워드가 죽음과 동시에 아들 다니엘의 보모이자 그녀의 스트립 클럽 동기이자 친구 그리고 연인이기도 했던 미시에게 고소를 당했는데 동성애자이기도 했던지 서로 성적으로 이용했느니 안 했느니 하면서 미시는 그녀에게 20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법원은 80만 달러를 미시에게 지불하라고 선고했지만 이는 애나가 가지고 있지 않은 거액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녀의 수술한 가슴에는 곳곳에서 혹이 발견되었고 감염으로 인한 응급 수술로 이어졌다.
애나는 몸도 아프고 돈도 없는데 믿었던 친구의 소송까지 겹쳐 결국 900만 달러의 빚을 진 채 파산선고를 하였다. 그 무렵 애나는 아들 다니엘과 털이 많고 이상하게 생긴 스무 살 연상의 남자 레이를 만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애나는 과도한 스트레스 및 하워드의 아들 피어스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편집증에 시달려 폭식을 하게 되고 엄청난 양의 약을 복용하게 된다. 그녀는 레이와 사는 동안 약물로 죽을뻔한 고비를 넘기고 영구 뇌손상이 왔을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고 레이는 그녀를 설득하여 재활 치료 센터에 들어갔다.
그녀는 한시적으로 금주를 하고 조깅도 시작했으나 오래가지 못했고 가슴 통증이 재발하는 내내 레이는 정서적으로 위안이 되어줬지만 법적 경제적으로는 해결할 문제가 산적해서 헤어졌고 29세의 젊은 변호사 하워드 스턴이 운영하는 작은 법무 회사와 계약하게 된다. 눈이 삼백안도 아닌 사백안에 가까운 수상쩍은 생김새의 그 남자는 그 뒤로 10년 넘게 그와는 친구이자 연인이자 고용인 그리고 매니저 등 1인 다역을 맡게 된다.
2002년 애나는 티브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동을 보여주는데 원체 스마트함과는 거리가 먼 데다 그녀 자신조차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행동 패턴을 대중은 즐기기 시작했다. 애나 니콜 스미스 쇼를 하면서 방귀나 트림을 스스럼없이 하는 등 경박함의 끝을 보여주었고 그나마 자력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되어서 한시름 던 것도 있었다.
그리고 대중 친화적인 행동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면서 아들과 출연도 같이 하였는데 다니엘은 이런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너희 엄마는 최악이라며 놀리기 일쑤였다. 엄마가 아들에게 수치심을 주었다면 변호사 스턴은 그녀를 대놓고 뚱뚱한 돼지라고 불렀으며 쇼에 출연해서 그녀에게 체중계 위에 올라가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 살이 쪄서 130킬로그램에 육박했던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인터뷰장을 떠났다. 하지만 약 3년간 리얼리티 쇼에 출연한 이후로 그녀는 체중 감량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무렵 파파라치 사진가 래리를 만났다. 변호사 스턴도 소송 준비 등으로 종종 집에서 자는 일이 있었는데 다니엘은 엄마의 이런 사생활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이런 난잡한 환경 속에서도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 효자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도 이미 우울증과 불안증으로 병이 깊은 상태였다.
다니엘은 대학에 들어갔지만 성적은 형편없었고 생전 처음으로 엄마와 다투게 된다. 그런 와중에 애나는 여러 번의 유산 끝에 임신에 성공했다.
그녀는 거처를 바하마로 옮기고 임신 4개월째 아기의 건강에 대한 편집증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모든 약을 중단했고 금단 증상을 겪어 병원에 입원하였다. 임신 전이나 후에도 래리는 애나의 건강을 생각해서 약을 먹지 못하게 방해했지만 그것이 불화의 원인이 되었고 결국 애나는 래리를 쫓아냈다. 그리고 나중에 래리는 언론에 그녀에 대해 폭로하여 그녀를 더욱 화나게 하였다. 그런 사이 다니엘은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다니엘은 자신의 피부 위에 뭔가 기어 다니고 있다고 소리쳤고 결국 플로리다의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2006년 9월 7일 애나는 딸 대니얼린을 낳았고 다니엘은 엄마와 갓 태어난 여동생을 보기 위해 바하마의 병원에 도착했다. 다음 날 오전 애나는 아들이 누워있는 침대 곁으로 가서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졌으나 아들의 서늘한 피부 온도에 소리를 질렀다. 의사와 직원들이 달려와 일련의 조치를 했지만 그는 깨어나지 못했다.
다니엘의 사인은 여러 가지 약물의 결합 복용에 따른 부작용으로 밝혀졌다. 애나가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려고 했던 이유가 모두 사랑하는 아들 때문이었는데 그녀의 전부가 사라졌으니 애나의 통곡은 극에 달했다. 그녀는 다니엘의 장례식장에서 관뚜껑을 열라며 절규하였고 한 아이를 다른 아이와 바꾸지 말라고 하늘을 원망하였다.
그토록 원하던 딸을 얻은 기쁨도 단 하루뿐이었고 애나는 연일 다니엘을 잃은 슬픔에 빠져 지냈다. 그녀는 발작과 비명을 일삼으며 다니엘을 어디 있느냐며 찾아 헤맸다. 그녀는 식음을 전폐하며 아기를 안고 있었다. 애나는 밥을 먹지 않는 대신 하워드 스턴의 도움으로 약에 취해 지냈다.
애나의 슬픔과는 별개로 언론은 연신 다니엘의 돌연사에 관한 보도를 하였고 그런 와중에 태어난 딸의 친부 문제로 법적 소송에 휘말리게 된다. 애나는 대니얼린이 자신의 변호사 스턴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고 하였지만 그녀의 전 남자친구인 사진가 래리 버크헤드는 자신이 애 아빠라고 주장하였다.
애나는 가뜩이나 가슴 성형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였는데 엉덩이까지 확대 수술을 하는 통에 조직에 농양이 생긴 대규모 감염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고통을 잠재우려 진통제를 비롯한 마약성 약물을 계속 주입하면서도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여행을 다녔다. 그녀는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린 가운데 애나는 잠을 청하려고 갖은 약을 먹었고 진통제를 비롯한 얼음 목욕과 항생제를 투여했다.
다니엘이 죽은 지 5개월 후인 2007년 2월 8일에 하워드 스턴이 보트를 점검하러 나간 사이 그녀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전화를 받았고 이런 일련의 상황은 다니엘이 죽었을 때와 일치하였다.
그녀의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에 따른 부작용이었고 스턴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그녀의 죽음과 관련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타살의 흔적은 없었고 스턴과 그녀에게 진통제를 보내준 의사도 혐의 없음으로 최종 판결을 받았다.
그녀의 사망 이후 딸의 친부 문제가 또 거론되기 시작하였는데 적어도 5명이 딸의 친부라고 주장하였다. DNA 검사 결과 파파라치 사진가 래리 버크헤드가 친부라는 것이 밝혀졌고 변호사 스턴은 이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39세의 나이에 죽은 애나의 순자산은 100만 달러 정도였고 그녀의 재산은 딸 대니얼린이 성인이 되면 상속받을 예정이지만 소송 중인 8500만 달러 상당의 금액은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대니얼린은 2013년 아동 게스 모델로 활동하였고 엄마와 똑같은 외모로 대중의 관심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개인 수익도 적지 않은 터라 그녀를 돌보고 있는 아빠 래리와 그녀의 미래는 크게 걱정할 일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