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비는 양친으로부터의 맹목적인 애정과 섣부른 기대를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고심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일류 취향의 합리주의자들이다.
편리해져서 좋잖아요?
편리한 건 따분한 거야.
나는 아무 데도 아프지 않단다. 요즘 늙은이들은 걸핏하면 병원이더구나. 병원이 무슨 집합소인 줄 아나 봐. 몸이 아픈 걸 자랑처럼 늘어놓고. 나 역시 몸이 안 좋아서 가끔씩 병원에 가긴 하지만, 그런 질 나쁜 환자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아서 께름칙할 때가 많단다.
전쟁은 안 돼요. 그건 미리 막는 게 좋아요. 누님. 전쟁은 아픈 것이니까요.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막는 것도 여자의 손에 달렸어요. 히틀러나 괴벨스는 연설로 우선 여자들을 녹여놓았지요. 그자들은 여자들을 설득하는 것밖에 생각할 줄 몰랐어요
남자란 여자 뒤꽁무니를 따라오는 존재니까요. 전쟁은 여자들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거예요.
난 끝난다는 게 두려워. 끝내버릴 바에는 도중에 팽개쳐두는 게 좋다고 생각해. 그러면 또 계속될 테니까.
행복이란 사람을 태아처럼 웅크리게 하는 것인 듯하다. 태아처럼 단순한 상태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음에 틀림없다. 자궁에서 쫓겨날 때부터 인간은 행복에서 멀어져 간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행복을 만들려고 한다. 어쩌면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 불행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행복은 질서 안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혼돈 사이를 방황하는 것이라고. 자궁에 있었을 때가 행복한 것은 장차 자궁에 벗어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원히 자궁 안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행복 같은 것이 없다. 자궁에서 추방당해 갖가지 혹독한 시련에 부딪히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다. 사람은 자궁에서 추방당한 다음 인공 자궁을 만든다. 가족이나 공동체, 또는 법이나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같은 인공자궁에서 일탈한다. 그리하여 일탈한 후 맨 처음 외부에서 자궁을 바라보며 말한다. ‘낙태당하니 후련하군’ 하고. 하지만 조금 지나면 그 자궁이 그리워진다.
제아무리 성숙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한 꺼풀 벗기면 어린아이가 된다. 어린아이는 또 한 꺼풀 벗기면 태아가 된다.
이렇게 말한다면 과장일까? 이전부터 나는 일정한 형태나 모습을 갖춘 신 따위는 천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