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체 May 13. 2024

문학 줄리언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


                        

 

루앙 시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크루아세로 차를 몰았다.


 



 

그때 나는 위쪽 벽장 위에 또 다른 앵무새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여자  안내원에게 어느 쪽이 진짜냐고 물었다.


 


 

죽기에 알맞은 때가 따로 있는가?


 


 

집에 돌아온 뒤에도 두 마리의 앵무새가 나의 마음속에서 계속 푸드덕거렸다. 그중 하나는 사랑스럽고 솔직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다른 하나는 건방지고 의심에 찬 모습이었다.


 


 


구릿빛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처럼 낡고 오래된 느낌.



그가 경멸했던 도시,

그리고 그 앙갚음으로 그를 크게 무시해 온 그 도시를 넘어 멀리 남쪽을 응시하고 있다.



플로베르에 관한 한 지금까지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백 년 전쯤 죽었고,

이제까지 그의 것으로 남아 잇는 것은 그가 쓴 것뿐이다.

기록, 관념, 구절, 은유, 음악적 구조를 가진 그의 산문뿐이다.




왜 우리는 그 책을 쓴 작가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싶어 하는가?
왜 우리는 작가를 내버려 두지 않는가.
왜 우리는 이미 쓰인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가.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이 뒤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진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의 버릇 때문에 나는 아직도 제일 좋은 것은 맨 마지막까지 건드리지 않는다.
작가들도 때때로 이와 비슷한 충동에 사로잡히는가?
기다리고, 기다려라. 가장 좋은 것은 아직 남아 있다.
만일 그렇다면, 미완성 작품들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한때, 나는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겐 아이디어가 많았고,

준비 노트까지 만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결혼해서 자식이 있는 의사였다.

사람이 정말로 잘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뿐이다.

플로베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잘할 수 있던 것은 의사라는 직업이었다.

나의 아내는.... 죽었다.




19세기에는 그렇게 늙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단순히 그의 육체에 예절 감각이 있기 때문에,

때 이르게 늙어 버린 정신에 순응하기 위해서 육체도 최선을 다했는지 모른다.


나는 이 시대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숨이 막힐 정도의 증오심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꽉 막힌 탈장의 경우처럼 똥물이 나의 입에 고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입 안에 간직하고, 응고시켜 굳어지게 하고 싶다.

인도인들에 탑에 소똥을 칠하듯이, 나는 19세기를 칠할 반죽을 만들어 내고 싶다.



이야기의 어조를 조절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조잡하게 박제된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새가 삼위일체 중 3분의 1을 차지한 성령을 상징하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

그것도 그 의도가 풍자적이거나 감상적이지도 않고 또 신성 모독도 아닌,

그런 소설을 쓴다는 것이 기법상 얼마나 어려울지 상상해 보라.



앵무새는 플로베르식 기괴함이 완벽하게 다듬어진 전형이다.




나는 너무나 과도하게 은유를 사용하고자 하는 나의 습성 때문에 시달리고 있다.

이가 꾀어들듯이 비유하는 습성이 나를 잠식하고 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비유하려는 성향을 억누르는 데 다 썼다.




하나의 이야기에서 너무 많은 것을 읽어 내고 있다고 생각되는 때가

바로 당신이 가장 취약하고, 고립되어 있고 어쩌면 어리석게 느껴지는 때이다.




삶 속으로 뛰어들면, 당신은 삶을 명확히 보지 못한다.
당신은 삶 속에서 지나치게 고통을 받든가, 아니면 지나치게 즐기게 된다.




예술가란, 내 생각에 자연을 벗어난 어떤 것, 괴물과 같은 존재이다.



낙타는 가장 멋진 동물 중의 하나이다.

나는 육체적, 정신적 양면의 움직임이 낙타와 비슷하다.

시작하기도 어렵거니와 시작하면 멈추기도 어렵다.

가만히 있든 움직이든 간에 내게 필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다니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방향 감각을 잃고, 혼란스럽고,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는 남아 있는 표지판을 따라간다.

거리의 이름을 읽기는 해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주위는 온통 폐허뿐이다.

사람들은 결코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우연의 일치에 대해 관심이 없다.

우연의 일치라는 생각에는 좀 으스스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는 신이 운행하는 질서 정연한 세계에 살고 있지만

신이 직접 우리의 어깨너머를 넘겨다보면서 우주의 계획에 대한 대강의 힌트를

떨어뜨려 우리에게 도움을 주려 한다는 생각을 잠시라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상이 혼돈스럽고 제멋대로 돌아가고 순간적으로는 물론 영원히 미쳐 있으며,

인간은 확실히 무지하고 야비하며 어리석은 존재라고 느끼는 편이다.





우리는 책에서 우연의 일치들을 발견한다.

그러한 기교는 천박하고 감상적인 면이 있다.

미학상 그런 기교는 겉만 번지르르하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가 소설이란 이렇게 써야 한다고 규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독재자라면,

나는 우연의 일치들을 소설 속에서 내쫓고 싶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가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연의 일치를 정당화하는 한 가지 방법은 말할 것도 없이 아이러니로 미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민한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내가 비평가들을 미워하는 이유를 말하겠다.

내가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실패한 창작가라든지, 그들이 천성적으로 흠잡기 좋아하고,

질투심 많고, 허영심이 강하다는 평범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내가 비평가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글쎄 ,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플로베르는 진보를 믿지 않았다.
특히 그가 도덕적 진보를 믿지 않았던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어리석은 시대였다.





플로베르는 민주주의를 통치의 역사에서 단지 하나의 단계라고 생각했고,

민주주의가 사람들 서로를 통치하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자랑스러운 방법이라고 가정하는 일은 인간의

전형적인 허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인류가 끊임없이 진화한다는 것을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만드는 사회 형태의 발전도 믿었다.

가장 좋은 정치란 사라져 가는 정치 체제인데, 그 이유는

이것이 다른 어떤 것에서 길을 터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문학은 정치를 포함하지만 정치는 문학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삶은 진보하고 있는가>






그러나 실제로는 젊은이가 늙은이보다 훨씬 더 괴팍스러워서,

늙은이보다 훨씬 이기적이고, 자기 파괴적이며, 기묘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신문은 늙은이보다 젊은이를 더 너그럽게 평가해 준다.



80세나 70세 또는 54세에 자살을 하는 경우,

그 자살은 뇌연화증이나 폐경기 이후의 우울증 또는 다른 사람들이 죄의식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계획된

천박한 허영심의 마지막 발로로 간주된다.


20세에 자살을 하는 경우,

그것은 보잘것없는 삶의 조건에 대한 고결한 거부 행위로, 용기 있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저항 행위로 인정된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은 노인들이 우리를 대신할 수 있다.

물론 완전히 미친 생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문학 파스칼 키냐르의 로마의 테라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