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파스칼 키냐르의 로마의 테라스

by 무체

절망에 바진 사람들은 구석에서 살아가는 법일세.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모두 구석에서 살아가지. 책을 읽는 사람도 구석에서 사는 거네. 절망한 자들은 숨을 죽이고, 누구에게 말을 하거나 누구의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마치 벽에 그려진 사람처럼 공간에 달라붙어 살아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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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둠의 편린을 쫓다가 어둠에 빠져 들어요.



포도알은 부풀다가 터지고요.

초여름에 자두는 모두 벌어지고 말아요.

유년기가 끝날 때 어떤 남자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어요?




질료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하늘이야. 하늘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생명이지. 생명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자연이고. 그러면 자연은 자라서 각양각색이 형태들로 모습을 드러내네.


이 세상 특유의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게 있거든. 그것은 대체로 꿈이라네.




이유를 대는 것은 삶을 황폐하게 만드오. 사랑하는 대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거짓에 불과하지.

인간은 살아 있다는 감각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느낌에만 기뻐하기 때문이라오.

또 다른 삶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 세상에는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점들이 존재하오. 이런 공간들은 옛날이 굳어진 순간들이지. 모든 것이 먼 옛날의 열정을 지니고 그리로 집결한다오. 그것은 하느님의 얼굴이오.



이제 내 육체 속에는 내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 두렵네. 내 살갗이 지나치게 얇아졌고, 구멍이 더 많이 생겼다고 느끼지. 난 혼자 중얼거리네. 언젠가 풍경이 나를 통과하겠지….




어떤 나이가 되면, 인간은 삶이 아닌 시간과 대면하네. 삶이 영위되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지. 삶은 산 채로 집어삼키는 시간만 보이는 걸세.



선악과 이후로 인간을 파멸로 몰아간 것은 과다한 겉치레와 색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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