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fashion story

리젠시 시대의 위장술 긴장갑 스토리

by 무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일명 '리젠시 시대'는 드라마 브리저튼 (Bridgerton)의 흥행과 함께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드라마 속 여성들은 티아라를 쓰고 가슴 바로 아래에서 떨어지는 하이 웨스트의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은 채 파티장을 누빈다.


그리고 이 룩의 마침표는 언제나 팔꿈치를 덮는 긴 장갑, 즉 롱 글러브 (Long Glove)다. 흥미로운 점은 이 우아한 장갑이 초기에는 철저한 위장술의 도구였다는 사실이다. 신분제가 서서히 와해되고 산업혁명의 기운이 감돌던 시기, 장갑은 햇볕에 그을리거나 거친 노동으로 상한 손을 가리기 위한 최고의 '필터'였다. 하층민 여성들에게 장갑은 자신의 신분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는 마법의 아이템이었던 셈이다. 맨손을 드러내지 않는 한 그녀가 귀족인지 평민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으니 당시 여성들에게 이보다 더 완벽한 신분 세탁 도구는 없었을 것이다.



장갑 하나로 너도나도 귀족 흉내를 내기 시작하자 진짜 상류층 여성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최고급 소재의 가갑 위에 화려한 반지나 팔찌를 겹쳐 착용하는 기이한 유행을 만들어냈다. 가죽 위로 번쩍이는 보석을 과시하며 "나는 노동 따위는 하지 않는 손"임을 시위한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속물근성은 패션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된다. 결국 피부 보호와 콤플렉스 커버라는 실용적 목적에서 시작된 장갑은, 아이러니하게도 상류층의 사치와 매너를 상징하는 도구로 변질되어 파티와 사교 모임의 필수품으로 등극하였다.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속 오드리 헵번.jpg


20세기로 넘어와 장갑은 할리우드와 백악관을 거치며 우아함의 대명사로 자리 잡는다. 1950년대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Breakfast at Tiffany's)의 오프닝 신을 기억할 것이다.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이 블랙 드레스에 긴 장갑을 끼고 빵을 먹는 장면은 패션 역사상 가장 우아한 순간으로 꼽힌다. 하지만 영화 속 그녀의 캐릭터가 신분 상승을 꿈꾸는 하층민 출신 콜걸이었음을 상기해보면, 그 장갑은 단순한 패션이 아니라 그녀의 비루한 현실을 가리기 위한 처절한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1960년대 미국의 퍼스트레이디 재클린 케네디 (Jacqueline Kennedy) 역시 공식 석상마다 흰 장갑을 착용하며 완벽하게 정제된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갑은 맨살을 보이는 것을 천박하게 여겼던 보수적인 에티켓의 산물이자 '잘 교육받은 여성'의 상징이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실용주의가 대두되면서 거추장스러운 장갑은 일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운전할 때나 방한용으로 잠깐 쓰일 뿐, 파티에서 장갑을 끼는 것은 과도한 코스프레 취급을 받기도 했다. 여전히 보수적인 영국 왕실 정도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들었던 이 아이템이 최근 다시 부활하고 있다. 브리저튼의 영향으로 앤티크한 무드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셀럽들이 레드카펫에서 장갑을 끼는 이유는 과거와 다르다. 거친 손을 가리기 위함도, 조신한 매너를 지키기 위함도 아니다. 그저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해서다. 노동을 숨기기 위해 시작된 장갑이 이제는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한 도구가 되었으니 패션의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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