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5-3. 읽는다는 건, 결국 나를 다시 믿는 일이다

독서는 처음이지?

by 에밀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잘 몰랐다.

 누가 말하면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누가 방향을 알려주면 그쪽으로 걸어가던 사람이었다. 큰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스스로를 믿을 만한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안하면 더 휘청거렸고, 작은 일에도 쉽게 흔들렸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 돌아봐도 어딘가 허공에 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다 우연히 책을 집어 들었고, 그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면서 조금씩 이상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이런 사소한 깨달음들이 마음속 저 깊은 곳에 작은 점처럼 찍혀갔다. 그 점들이 어느 날 선이 되고, 또 어떤 날에는 면이 되었다. 나는 그때 비로소 느꼈다.

 “아, 나는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이건 과장이 아니다.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읽는 과정에서 내 마음을 직접 움직여본 경험을 처음 했기 때문이다. 누가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판단해본 순간들. 그 작디작은 순간들이 모여 나라는 사람의 중심을 만들었다. 마치 흩어진 모래알들이 비로소 서로 붙어 단단한 형태가 되는 것처럼.


 독서는 결국 ‘내가 어떤 방향을 향해 서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해답을 얻기 위해 읽은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설명하는 언어를 찾기 위해 읽은 것이다. 그 언어가 생기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흔들리는 폭이 줄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세상이 시끄럽든, 나는 내 안에 작은 중심을 하나 갖고 있었다. 그 중심이 나를 지탱해주었다.


 당신도 아마 이런 중심을 찾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책을 다시 읽어보려고 하다가도, 막상 펼치면 집중이 잘 안 되고, 문장 하나가 이상하게 멀게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멋있는 사람들은 다 독서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왜 이렇게 서툰지 스스로 답답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랬다.

 한 문장을 읽는데 자꾸 눈이 미끄러지고, 마음은 책 밖으로만 나가고, 책장을 넘겨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안다.

 그 서툼조차 독서의 시작이었다는 걸.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깊이 읽는 건 아니다.

 아니, 대부분은 그렇게 시작하지 않는다.

 잠깐 읽다가 멈추고, 멈췄다가 다시 읽고, 어떤 날은 한 장도 못 읽고, 어떤 날은 이유 없이 갑자기 읽히고… 그런 느슨한 흐름 속에서 어느 순간 나만의 속도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속도는 절대로 남과 비교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책을 빨리 읽는다고 삶이 빨리 달라지는 건 아니다.

 독서는 속도가 아니라 관성이다.

 조금씩이라도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힘, 그게 독서의 진짜 가치다.


 나는 언젠가 이런 문장을 노트에 적어둔 적이 있다.

 “오늘의 한 줄이 내일의 나를 만든다.”

 그때는 그 말의 무게를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문장의 전체를 안다.

 정말로 그렇다. 당신이 오늘 딱 한 줄 읽었다면, 내일의 당신은 이미 조금 달라져 있다. 이건 추상적인 이야기나 희망 섞인 말이 아니라, 내가 경험으로 얻은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큰 변화를 꿈꾼다.

 인생의 방향을 단번에 바꿀 어떤 거대한 사건, 한 번에 모든 것을 설명해줄 해답 같은 것. 그런데 현실의 변화는 그렇게 오지 않는다.

 삶은 아주 작은 기울기가 오랫동안 계속될 때 변한다.

 독서는 그 작은 기울기를 만드는 가장 단순하고도 강력한 방식이다.


 책 속 문장 하나가 마음에 남고,

 그 문장이 오늘 하루를 조금 다르게 만들고,

 그 하루가 쌓여 어느 날 전혀 다른 시야를 만들어낸다.

 그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면 비로소 알게 된다.

 “나는 나를 다시 믿어도 되는 사람이구나.”


 독서는 그 믿음을 회복시키는 과정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어떤 삶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 감각을 되찾는 일이다.

 그러니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나라는 사람에게 다시 손을 내미는 행위다.


 나는 과거의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때 고작 몇 줄 읽은 네가, 지금의 너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에게도 같은 말을 전하고 싶다.

 “당신이 읽고 싶은 마음을 낸 그 순간,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


 읽는다는 건, 결국 나를 다시 믿는 일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앞으로의 당신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바꿔놓을 것이다.

 나는 그 길을 걸어왔고, 당신도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다시 자신을 믿을 수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