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은 호구 사장님을 원한다

'자발적 호구' the beginning

by Tugboat

"바뀐 세상도 내가 여전히 호구이기를 원했다.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조금 더 많이 너그러워지자,

내 편에 서주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모두의 이익이 늘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된 광고쟁이, 호구의 삶을 다시 시작하다


나에게 전혀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국내 최고의 화장품 회사에서 방문판매 특약점 사장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방문판매? 응답하라 1988에 나온 그거?"

"아직 우리나라에 방문판매 화장품이 있어?"


있다. 그것도 국내 1, 2위 화장품 회사 모두에. 이제 드라마에서 처럼 유니폼을 입고 캐리어를 끌고 다니지는 않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 같은 제품을 판매하는 다른 유통 채널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매출을 올려왔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잠시 위축되긴 했어도, 여전히 건재한 유통 채널이다.


제안을 받고 오픈하기까지 주어진 시간은 단 3주. 고민하고 판단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저할 이유도 없었다. 그 지긋지긋한 '을' 딱지를 뗄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무려 '사장님'이라는데.




사장님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을'


생애 처음으로 내 사업을 한다는 것에 불안함도 있었지만, 본사의 사업 방향만 따르면 된다는 안정성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나는 무리 끝에 본사 직영 지점 한 곳을 인수했다. 불과 2주 만이었다. 마침내 내 사업을 한다는 설렘에 밤잠을 설쳤지만, 정작 맞닥뜨린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내 자본이 100% 투자된 영업장이었지만, 온전한 내 사업이라 말하기에는 애매했다. 본사를 둔 대리점 사업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이 경우는 조금 더 특별했다.


최고 100명이 넘는 구성원이 있었지만, 온전한 내 직원은 3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뷰티 카운셀러'라는 이름의 방문판매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 사업자라 출퇴근도 영업 활동도 본인 마음대로였다. 나와는 단지 파트너 관계일 뿐이었다.


이 구조가 상황을 묘하게 만들었다. 나와 계약을 맺고 나로부터만 물건을 수급하며, 한 달간 판매한 수당을 월급처럼 나에게 지급받는다는 면에서 보면 이들은 영락없는 내 직원이다.

하지만 반대로, 본사에서 공급받은 내 제품은 이들에게만 판매할 수 있고, 이들이 수금을 해주지 않으면 나는 수익을 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은 나의 유일한 고객이었다.

이런 이중적인 구조는 이름뿐인 사장을 만들었다.


우리 영업점만의 원칙과 색깔을 만드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나 페널티를 만들면 누군가는 반드시 개인적인 예외를 요구했다. 판매에 지원하는 판촉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조용히 찾아와 바꿔달라고 떼를 썼다.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연락 없이 잠수 타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심지어 영업 시작 전 요주의 인물로 들었던 한 판매원은 대놓고 나에게 기 싸움을 걸어왔고, 영업장에서의 불만을 본사 영업 담당에게 직접 해결하려 드는 사람도 있었다. 방문판매원과 영업장 사이의 약한 연결고리 탓에 생긴 문화였다.




본사와 파트너, 그 사이에서 치이는 사장님


안정적인 구조라고 좋아했던 본사와의 관계는 또 어땠을까? 분명 내 돈 들여 시작한 내 사업이지만, 때로는 본사의 경영 개입이 선을 넘었다. 반응이 시원찮은 제품의 판매를 압박하거나, 초과 매입을 강요하는 일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진짜 문제는 경기가 안 좋아 판매가 힘들 때 찾아왔다. 본사가 판매 증진과 상관없는 영업 담당팀 목표를 설정하는 것. 이건 그야말로 이중고 재앙이었다.


힘을 합쳐 활로를 찾아도 어려운 판에, 본사 사업비 예산이 엉뚱한 곳으로 책정되었다. 이때는 단순히 본사의 판매 지원만 약해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판매와 상관없는 일에 물적, 심적 투자를 요구해 왔다. 최악의 경우, 그들의 방향이 '영업 방해''수익 악화'를 야기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이 '갑'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장이 된 '을'이 만든 기적


결국 나는 해법을 지금까지 내가 일해왔던 방식에서 찾았다. 다시금 ‘을’의 자리에 서는 것. 카운셀러들의 무리한 요구와 항의에도 우선 사과부터 했다. 규칙을 따라준 당연한 상황에는 감사의 말을 먼저 건넸다. 원칙에 대한 입장은 이전과 마찬가지였지만, 원칙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바꾼 것뿐이다. 사과는 거절이었고, 감사는 필요없는 칭찬이었을 뿐이다.


우리의 이익과 상반된 본사의 요구에 대한 대응도 바꿨다. 더 이상 부당함을 강하게 항의하지 않았다. 사실 그걸 전달하는 담당 영업사원이 무슨 죄인가? 어쩌면 그들도 불쌍한 총알받이일 텐데, 이미 다른 지점 사장들에게 배부르게 욕을 먹었을 텐데 굳이 나까지 보탤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영업사원의 고충을 이해해주고 위로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유대 위에서 부탁했다. 협조는 하겠지만 우리도 많이 힘드니 조금만 도와달라고.


정당한 내 권리 위에서 당당하게 싸울 때보다 분명 손해는 있었다. 내가 옳은 상황임에도 굽실대야 하는 비참함이 마음 아팠고, 스스로 허물을 자처하니 하지 않아도 됐을 물질적 보상으로 손실이 생기기도 했다. 주변의 다른 사장님들은 "휘둘리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먹으라"며 충고했다. 아마 안타깝고 미련하게 보였을 것이다. 소속 카운셀러들에게 쩔쩔매는 사장 모습. 오죽 못나 보였을까? 대부분 본사 퇴직 임원 출신이라 40대 초반의 내가 많이 미숙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에 대해 나는 확신이 있었다. 이미 광고대행사에서 많이 겪어본 패턴이었기 때문이다. 사장이라는 권위를 쥔 채 '을'을 자처하니 효과는 더 좋았다. 결국 우리 영업장은 인근 지점 중 가장 짧은 기간 내에 월 매출 3억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고, 소속 판매원을 두 배로 늘려 오픈 1년 만에 확장 이전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오픈한 다른 지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과였다.


두 번의 완전히 다른 사회생활을 마친 지금, 나는 이렇게 확신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호구를 원한다. 아마 인류의 탄생이래 인간은 항상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내 주변에는 착한 호구를 두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마음 놓고 편히 대해도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친구부터, 머리 굴리며 긴장하지 않아도 내 몫을 넘보지 않을 거래 상대까지. 그런 마음씨 좋고 도움이 되는 호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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