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호구의 표현법
학문적으로 사람을 정의하는 말은 많다. 지금의 유일한 인간종을 지칭하는 '호모 사피엔스'부터 직립 보행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호모 에렉투스', 도구를 쓴다고 해서 '호모 하빌리스', 쓰는 것을 넘어 직접 도구를 만드는 인간 '호모 파베르', 그리고 그걸로 유희를 즐기는 '호모 루덴스' 등등. 그중 내가 가장 가치를 두는 정의는 '호모 로쿠엔스'_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즉 말하는 사람이다. '말'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인 이유이며 문화를 만들고 발전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내가 말과 글로 먹고 살아온 인간이라 그렇게 더 의미를 두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이 '말'의 중요성이란 내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것도 같다. 말은 권력을 반영한다. 돈이나 지위처럼 말이다. 따라서 이것 역시 강자에게로의 쏠림이 있다. 더 힘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는 거다.
대부분의 상황을 보자. 한정된 시간 속에서 대화는 결국 힘 있는 자의 독백으로 흐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침묵하는 구조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회의실과 토론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시간이 제한된 대화는 그 자체가 권력 투쟁의 장이다. 힘 있는 사람은 이 무대에서 언어를 무기로 휘두르며 주도권을 장악해 나간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의 시작을 알린다. "오늘 회의는 ~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같은 한마디로 모든 의견과 아이디어는 그 틀 안에 갇힌다. 이제 그 의제를 벗어난 이야기는 '주제와 맞지 않는' 무용한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더 속 터지는 상황은 이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말할 기회 자체까지 통제한다는 것. 뭐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강한 자들이 자기몫의 발언 시간을 더 챙겨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치자. 하지만 그들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할 기회까지 나서서 정리해 버린다.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발언에는 시간을 주고, 내 생각에 반하는 말은 끊어버리기 일쑤다. 심지어 때로는 그의 편에 선 이야기마저 그 내용이 마음에 들면 중간에 가로채 버리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힘없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어설프게 말을 시작했다가 눈총만 받게 되는 일이 허다하다.
'자발적 호구'는 약자다. 약자보다 더 몸을 낮추려는 사람이다. 하지만 원하는 게 있어서 약자를 자처하고 있을 뿐이지 속 없는 바보가 아니다. 이 흐름에 순응하고 지켜보자면 진짜 호구 잡히게 될 텐데, 그렇다고 갑자기 '자발적 호구'의 탈을 벗고 말하기 권력 쟁탈전에 나설 수도 없는 노릇.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하고 주도권을 얻어오면 좋을까?
첫번째. 사전 정지 작업
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자신의 핵심 의견을 미리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메일이나 메시지 등으로 내 생각을 문서화해서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이면 더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캐주얼한 대화 상황에서도 사전 아이스브레이킹 때 슬그머니 내 생각을 미리 전달하자. 즉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당신의 아이디어가 모두에게 노출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일정 부분 내 의견이 논의의 한 축을 차지하도록 만들 수 있다.
두번째. 덧붙이는 방식으로 발언권 확보하기
'자발적 호구'가 감히 '갑'이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어렵게 얻은 발언 기회 때에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다 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보자. 그들의 발언이 끝난 직후 "방금 말씀에 덧붙여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와 같이 부드럽게 발언권을 확보하자. "좀 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권력자의 말에 동의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좀 더 환영받기 쉽다. 그냥 딱 한마디 정도 보태기도 쉽지않다면 "맞는 말씀이십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거기에 '이런 이런' 부분들이 더해지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는 어떤가? 이는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면서 내 의견을 말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세번째. 권위에 기대서 말하기
내 의견이 반드시 덧붙여져야 하는 상황이고 꼭 필요한 상황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최강자와 껄끄러워질 것을 각오하고라도 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라면 이 방법이 좋다.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이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최고 결정권자의 의지다. "대표 이사님 말씀에 따르면..."이라는 한마디면 모든 논란을 잠재울 수 있다. 물론 최고 결정권자의 생각이 내용면에서는 허점이나 결함이 많을 수 있고, 이 자리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보다 모자랄 수 있다. 하지만 어떤가? 여기 있는 그 어떤 권력보다 강한 권력에 편승한 건데. 누가 그걸 부정하고 이 말을 끊어낼 수 있겠나? 만약 내 생각이 결정권자의 생각과도 다르다면 차선책으로 지금 이야기하는 부분에 있어 유명인사의 말이나 전문 집단의 연구 결과를 추천한다. "보스턴 컨설팅 그룹의 연구에 따르면..." 같은. 그것도 안된다면 공자님 말씀도 좋고, 부처님 말씀도 좋고, 삼국지 같은 고전 속 이야기도 좋다. 성경 말씀도 좋고, 명언이나 격언도 좋고, 최근 핫한 책 속 문구라도 괜찮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근거가 된다면, '어디 한번 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조금은 생기지 않겠나?
마지막으로 꼭 권하고 싶은 것은 '두괄식으로 말하기'이다. 우리에게는 긴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주장을 하나의 강력한 문장으로 압축하라. 장황하게 설명하려다 기회를 놓치기보다, 단 한 문장으로 핵심을 꿰뚫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리고 말의 서두에 그 문장을 던지면서 시작하라. 당신의 짧고 명확한 한마디는 강한 여운을 남기고, 대화의 판도를 뒤흔들 수도 있다. 이것만 잘되었다면 이제 당신의 말은 끊겨도 상관없다. 혹시 이 문장이 상대방의 마음에 들었다면, 내 차례가 계속 주어질지도 모른다.
대화에서 힘이 없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기에 따라 이는 내 말의 가치가 더 높아질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침묵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 전략적으로 내뱉는 한마디는 그 어떤 장광설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말'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를 하고 듣는 것에 대한 논의를 조금 더 나눠보면 좋겠다. 사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우리에게는 말할 기회보다 들을 상황이 훨씬 많다. 그렇다면 이것을 잘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듣기에도 "잘 듣기"가 존재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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