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 텅 빈 거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넷플릭스 영화에 시선을 고정한다.
거친 총격전 끝에 마침내 악당이 벼랑 끝에 몰리고, 상처투성이의 주인공이 비장하게 총구를 겨눈다. 통쾌한 응징의 순간, 이야기는 갑자기 악당의 기구한 사연으로 플래시백 된다.
알고 보니 그 역시 무자비한 세상에 짓밟힌 피해자였고, 어떻게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던 가여운 가장이었다. 방아쇠를 당기려던 주인공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처단을 망설인다. 그 순간, 나의 안락했던 몰입도 엉망진창으로 흩어져 버린다.
불편하다. 나는 분노했다. 탁.
리모컨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생각한다. 이 불쾌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애초에 선악의 구도가 명확한 서사를 편애한다. 복잡하게 머리 굴릴 필요 없이 주인공의 어깨에 내 고단함을 얹어두고 즐기는 승리의 카타르시스는 완벽한 마취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은 불필요한 친절을 베풀며 기어이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 세상에 베어내기만 하면 끝나는 완벽한 악이 존재하는가.
모니터 밖의 현실로 눈을 돌려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거대한 이분법의 투기장이 되어버렸다.
뉴스와 소셜 미디어는 매일같이 새로운 '악당'을 색출해 내고 광장 중앙에 세운다. 사람들은 정치적 성향, 세대, 젠더, 혹은 그 어떤 알량한 신념 하나를 잣대 삼아 나와 결이 다르면 가차 없이 악으로 규정해 버린다. 선과 악으로 세상을 쪼개어 판단하면 참으로 편리하기 때문이다. 내 진영은 무조건적인 정의이고, 반대편은 척결해야 할 적폐가 된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더 기만적이고 씁쓸하다. 내가 악으로 매도하고 손가락질했던 저 집단의 목소리가 사실은 시대의 맹점을 정확히 짚어낸 혜안일 수 있고, 내가 핏대를 세우며 지지했던 '선'의 진영이 실상은 도덕적 위선과 탐욕으로 얼룩져 있을 수도 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선'이라 맹신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그 빈약한 논리 속에서 억지 선이 되어버린 것들이 시대의 주류로 행세한다.
세상은 대체로 다수결이라는 폭력적인 명분으로 굴러간다. 나침반을 잃어버린 맹목적인 신념들이 모여 거대한 다수를 이룰 때, 악은 번듯한 선의 가면을 쓰고 합법적으로 활보한다. 그 광기 어린 군중 속에서, 나는 과연 깨어있는 관찰자였던가. 아니면 얄팍한 기득권과 알량한 소속감을 지키기 위해 다수의 그늘에 숨어 익명으로 돌을 던지던 비겁한 악의 추종자였던가. 겉으로는 합리적인 어른인 척 헛기침을 해대면서도, 실상은 진영 논리의 아늑함에 취해 흑백논리로 세상을 재단해 온 속물. 그 부끄러운 민낯이 거울 앞에 선명하다. 내가 맹신했던 선이 역사적 심판대 위에서 진짜 악으로 판명 난다면, 나 역시 그 지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은 두 시간짜리 팝콘 무비가 아니다. 절대적인 선도, 완벽한 악도 없는 혼탁한 회색의 바다다.
이제는 부러지기 쉬운 뻣뻣한 '신념'의 돛대를 고집하기보다, 거친 파도 앞에서도 이리저리 휘어지며 묵묵히 균형을 잡는 '상식'이라는 이름의 유연한 조타수를 마음에 품어야 할 때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은 바라마지 않지만, 한 줌의 신념이 상식을 압도해 버린 요즈음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내 생각만 옳다는 아집을 내려놓고 타인의 다른 맥락을 들여다볼 수 있는 최소한의 유연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결함투성이인 나 자신과 세상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시대를 바라보는 이해의 품은 조금 더 넓어질 것이다. 거대한 담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악을 가르며 요란한 경적을 울리기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균형을 잡아주는 낡지만 단단한 예인선(Tugboat)처럼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관조하며 나이 들어가고 싶다.
단단하게 굳어진 신념의 칼을 내려놓고
세상의 회색빛마저 투명하게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오답투성이인 서로를 넉넉히 품어 안는
진짜 어른의 바다로 출항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