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 그 달콤하지만 위험한 환상

by Tugboat

베트남 하롱베이를 향해 달리는 대형 관광버스 안은 마치 명절날 큰집 거실처럼 왁자지껄했다. 화장품 방문판매 조직의 우수 카운셀러들을 인솔해 떠난 포상 휴가 길. 거친 영업 현장을 맨몸으로 뚫고 온 여사님들의 에너지는 낯선 이국의 피로감 따위는 가볍게 압도하고 있었다.


가이드가 내일 일정을 안내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하지만 삼삼오오 모여 수다 삼매경에 빠진 뒷자리의 소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몇 번 헛기침을 하던 가이드가 무심한 듯, 그러나 뼈 있는 한마디를 스피커 너머로 툭 던졌다.


"어머니들. 궁금한 거나 일정 중에 이해 안 되는 거 있으면 저한테 바로 물어보세요. 자기들끼리 다수결로 결론 내고 이상한 짓 하지 마시고요."


순간 버스 안은 빵 터진 폭소로 가득 찼다. 뜨끔한 사람 특유의 민망하고 쾌활한 웃음소리였다. 맞는 말이다. 이해가 안 되면 전문가에게 물어볼 일이지,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 다수결로 이상한 결론을 내리면 되겠는가?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별 거 아닌 것 같던 그 말은 지금까지도 내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다.

“이해 안되면 꼭 물어보세요. 다수결로 결론내고 나중에 딴 소리 좀 하지 마시구요.”




다수결.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것이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의사결정 방식이라고 배워왔다.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언제나 대의에 부합한다는 맹신이다. 하지만 치열한 세상 속에서 목도한 다수결의 민낯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사안이 복잡해지고 고도의 전문성과 뼈를 깎는 결단력을 요구하는 위기 상황일수록, 다수의 선택은 종종 하향 평준화의 늪으로 수렴되었다. 엔진이 꺼져가는 낡은 배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승객 전원의 거수투표가 아니다. 손톱 밑에 새까만 기름때를 묻혀가며 결함을 짚어내는 정비사의 냉정한 진단과, 밤바다의 해류를 읽어내는 조타수의 외로운 결단이다.


당장 눈앞의 작은 이익에 매몰되거나, 골치 아픈 고민과 책임을 회피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거대한 군중의 등 뒤로 재빨리 숨어버린다. 익명성에 기댄 다수의 목소리는 종종 무자비한 폭력으로 돌변하여, 심사숙고하는 소수의 지혜를 무참히 짓밟는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아비규환의 붕괴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구조대원들의 다수결 투표가 아니라 철근의 구조를 단번에 꿰뚫어 보는 전문가의 서늘하고 냉철한 판단 하나다. 응급 환자의 배를 가르기 전에 가족들의 찬반 투표를 기다리며 메스를 내려놓는 외과 의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복잡하고 중대한 문제들은 다수의 얄팍한 상식이나 적당한 타협보다는, 고독하더라도 날카롭게 벼려진 하나의 통찰을 요구한다. 전문성이 결여된 무지한 다수가 확신을 가지고 한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갈 때, 사회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벼랑 끝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으며 걷잡을 수 없이 퇴보한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듯 보였던 그 평범하고 무난한 결정들은, 훗날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거대한 재앙이 되어 우리 모두의 목을 조여온다.




세상의 부조리와 군중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일은 언제나 짜릿하고 달콤하다. 하지만 그 비판의 칼끝을 서서히 내 가슴팍으로 돌려보는 순간, 오만했던 쾌감은 뼈아픈 수치심으로 치환된다.


'나는 그 무지하고 무책임한 다수의 횡포에서 온전히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


지난 20년, 수백 번의 회의와 피 말리는 프로젝트들 속에서 나는 얼마나 자주 비겁했던가. 명백히 엇나간 방향으로 흘러가는 뻔한 기획안을 보면서도, 날 선 컨셉이 모두의 입맛에 맞춘 밍밍한 타협안으로 찌그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참석자 다수가 원하니까'라는 알량한 핑계 뒤로 숨어 눈을 질끈 감곤 했다. 대세에 거스르는 피곤하고 유별난 꼰대가 되기 싫어서, 혹여나 실패했을 때 쏟아질 책임의 화살을 혼자 감당하기 두려워서, 나는 기꺼이 다수 속에 내 몫의 표를 던지며 안도했다. 겉으로는 합리적인 조력자인 척했지만, 속으로는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으려 헉헉대는 겁 많은 아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우리 사회를 소리 없이 퇴보시키는 무지한 다수는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어리석은 타인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마다 침묵으로 동조하며 손을 들었던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이가 들고 연차가 쌓여간다는 것은, 더 이상 거대한 군중의 그림자 밑에 비겁하게 몸을 숨기지 않겠다는 무언의 서약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세상이 다수결이라는 그럴싸한 이름표를 달고 엉뚱한 내리막길로 달려갈 때, 비록 혼자일지라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단단한 용기. 누군가 대신 정답을 내려주길 기대하는 굴레를 벗고, 흠집이 나고 깨질지언정 스스로 선택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지는 넉넉한 품. 그것이 인생의 다음 장을 준비하는 진짜 어른의 태도일 것이다. 부디 우리의 나이 듦이, 당장의 편안함과 머릿수로 진실을 덮어버리는 무리의 합창에 눈먼 채 휩쓸려 가는 초라한 쇠락이 되지 않기를 조심스레 당부해 본다.



세상의 진보는 결코 무지하고 게으른 다수의 함성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고독한 책임의 무게를 피하지 않는 한 사람의 서늘한 통찰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법입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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