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엔 영화적인 체험과 거리를 두고 영화의 요소들을 반추하게 하는 장치가 이물감 없이 섞여있다. 아픈 환부를 들춰내 찌르는 듯한 시선이 <버닝>의 이야기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데, 이것은 이 영화를 완성시키는 하나의 배경이 된다. 그리고 그 배경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종수는 소설가를 꿈꾸지만 돈이 부족해 알바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우연히 어릴 적 친구였던 해미를 만나게 되고, 그 날 저녁 종수는 해미와 술자리를 가지게 되는데 이 때 해미는 종수에게 그레이트헝거와 리틀헝거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리틀헝거는 그냥 배고픈 사람' '그레이트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 그레이트헝거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모습에서 짐작되듯 해미는 그레이트헝거를 갈망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레이트헝거의 실존 조건은 리틀헝거를 면하는 것이 선행 되어야 한다. 물질적으로 안정적인 환경이 삶의 의미를 갈망할 수 있는 전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을 부정하고 저 멀리 있는 부시맨의 이야기를 동경한다.
종수는 해미와 반대다. 종수는 해미의 생각과 달리 그레이트헝거에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해미와의 만남은 지루한 일상에 찾아온 작은 일탈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해미가 사라진 후 알바를 하지 않고 온 신경을 해미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다. 어느새 종수에게 삶의 의미는 해미가 되어버린다. 아버지는 재판을 받고 있고 엄마는 떠났으며 아버지의 업 때문에 허름한 시골집에 반강제로 놓인 종수는 소설가를 꿈꾸지만 아직 등단하지도 못한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그런 연약한 현실에서 해미와의 육체적인 관계는 짜릿하고 잊지 못할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런 종수 앞에 자신이 물질적으로 얼마나 가진 것이 없는지 자각 시켜주는 존재 벤이 등장한다. 종수는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거기다 해미는 벤과 더 어울려 지낸다. 벤은 '헝거' 또한 아니다. 그는 모든 것에 풍족하며 심지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너무나 풍족한 삶을 살았기에 감정이 무뎌진 것은 아닐까 추측이 된다.)
그는 종수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 비닐하우스를 태울 때 그것이 쓸모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거죠. 그것들이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비 같은 거 에요. 강이 넘쳐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떠내려간다. 비가 판단을 해? 거기엔 자연의 도덕만 있지.. 자연의 도덕은 동시존재 같은 거 에요. 난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난 파주에도 있고, 반포에도 있다."
보잘 것 없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벤의 대사는 종수와 같은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안겨준다는 비유처럼 들린다. 말하자면 벤과 같이 모든 면에서 우월한 존재의 등장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현상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반드시 부유한 자와 궁핍한 자가 공존하며 그런 사회에선 비교는 필연이다. 서열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이 아니라 자연의 영속성이다.
그런 측면에서 위의 대사 속 동시존재는 '벤'처럼 월등한 존재는 어디에도 있고 그와의 비교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이것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벤이 말한 자연의 도덕임을 암시한다. 자연의 도덕은 곧 자연의 섭리다. ("한국에는 개츠비가 너무 많다." 라는 종수의 대사 또한 동시존재와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벤의 대사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카메라는 새가 무리지어 다니는 모습과 많이 자란 나무, 서서히 지는 노을까지 자연의 현상을 부각한다. 이것은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재난 또한 자연성의 일부임을 드러내려는 시선인 것이다.
그렇다면 종수에게 벤은 피할 수 없는 악 같은 존재다. 하지만 종수가 해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해미의 마음속에 박혀있는 돌을 꺼내줄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며 음악을 틀어놓고 파스타를 요리하는 그런 고급스러움도 갖고 있지 않다. 때문에 종수는 '우물'의 존재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해미가 말한 우물이야기에서 우물에 빠진 해미를 발견한 종수는 영웅이다. 종수는 자신도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넌지시 해미의 가족에게 그 기억이 진실인 양 떠본다. 그들은 우물은 없었고 해미는 말을 잘 지어내는 애라고 단정한다. 그럼에도 종수는 마을 이장에게까지 우물의 존재를 묻는다. 이번에도 없다고 한다. 종수는 포기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질문의 답은 왜 우물의 부재가 아닌 실재가 되는 것일까. 종수는 원하는 답을 얻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물의 존재에 대해서 묻지 않는 것이다. 우물 이야기가 사실이 되려면 일단 우물이 실존해야 해야 한다. 종수는 이렇게 최소한의 증거라도 얻어내 자신이 해미에게 영웅으로 기억되는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이다. 벤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지는 종수는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믿어서라도 해미에게 내가 불필요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원하고 있다. 그는 해미의 영웅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물이 있었다고 해서 해미를 구한 것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우물이 있었다고 해서 그가 벤보다 우월한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엄마는 우물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구한건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원하는 답을 얻었어도 그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해미와 관련해 벤보다 우월했다고 생각한 이 이야기조차 그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엄마가 떠난 날 아빠가 시켜서 자신이 엄마의 옷을 태웠던 기억을 꿈꾼다고 말할 때, 벤은 그런 종수에게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 후 종수는 엄마의 옷을 태우는 꿈을 꾸지 않고 비닐하우스가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보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방화되는 엄마의 옷은 곧 트라우마로 남았던 엄마의 '부재'를 상징한다. 꿈 속에서 방화의 대상이 전환 되었다는 것은 방화로 상징되는 부재의 대상 또한 전환되었다는 의미다. 엄마의 부재(엄마의 옷)는 해미의 부재(비닐하우스)로 전환되었다. 벤이 나타나면서 종수는 해미와 점점 멀어졌다. 해미를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이 벤에 의해 소멸되는 비닐하우스에 투영된 것이다.
해미와 연락이 되지 않자 종수는 벤을 해미를 죽인 살인마로 의심한다. 정확히 말하면 종수는 벤이 살인마이길 바라고 있다. 그래야 벤을 죽임으로써 해미의 복수를 이뤄주는 명분이 생기니까. 그래야 자신을 영웅의 위치로 승격시킬 수 있으니까. 종수는 해미의 부재를 비닐하우스의 방화와 연관지어 받아들인다. 이미 답을 정해놓고 그 답에 확신을 불어넣을 만한 단서를 찾는 것. 종수는 벤을 해미를 죽인 살인마로 정해놓고 이에 확신을 불어넣어 줄 단서들을 찾아 벤을 죽임으로써 복수를 이룬 영웅의 위치에 서려한다. 어느새 그는 해미를 찾는 것보다 열등감을 무마하는 것에 혈안을 둔다. 그렇게 종수는 불완전한 영웅으로 남은 우물이야기를 대체할 영웅서사를 쓴다.
하지만 방화된 비닐하우스는 발견되지 않는다. 해미의 전화를 보고 그녀의 집으로 갔지만 해미는 없었다. 비닐하우스를 다시 확인해 보지만 방화된 비닐하우스 역시 없었다. 판토마임학원과 해미의 동료직원에게 까지 찾아갔음에도 해미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문득 다시 비닐하우스로 돌아와 안을 살펴보다가 비닐하우스에 슬쩍 불을 붙인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늘어나는 불씨에 놀라 이내 불을 꺼버린다.
종수는 분명 우월한 삶을 살고 있는 그를 시기하면서도 그의 취미를 동경하고 있다. (열등감은 기본적으로 자신 보다 우월한 대상을 적대시 하면서도 그 대상의 특정 부분을 동경하는 이중적인 특성을 내포하지 않나.) 비닐하우스 방화를 목도하는 꿈은 벤의 취미를 동경하는 욕망과 그에게 해미를 빼앗길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응축된 꿈이다. 그 꿈엔 비닐하우스를 태운 방화범이 누군지 제시되지 않았는데 방화범의 주체가 모호해진 상태에서 양자는 모두 꿈에 반영되어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비닐하우스가 벤에 의해 방화된 것이라면, 이 꿈엔 실연에 대한 불안감이 내재한다. 반면에 종수가 방화한 것이라면 벤의 취미를 꿈속에서 실현한 셈이된다. 방화범이 누구냐에 따라 의미는 달라지지만 종수의 꿈엔 그 경계가 없다. 이때 어린종수의 표정은 불안한듯 격양된 표정을 띠는데 이 모호한 표정역시 이 꿈이 명확한 하나의 축을 통해 구성된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결말부에서 종수는 벤과 포르쉐를 태우며 전에는 하지 못했던 방화를 실현시켰다. 그렇게 보면 이 꿈은 일종의 플래시 포워드처럼 느껴진다.)
그런 양가적인 감정을 품은 채 고군분투하지만 해미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벤을 찾아간 종수는 그에게 비닐하우스는 이미 태웠다는 소리를 듣지만 방화된 비닐하우스를 발견하지 못했다. 스토킹까지 해도 명확한 답을 얻어내지 못한다. 스토킹 하면서 얻게 되는 것은 더욱 깊어지는 열등감이다. 종수의 엄마는 떠나갔고 아빠는 폭력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중인 반면 벤은 가족과 아주 화목하다. 벤이 가족과 식사하는 장면에서 벤은 용산 참사 그림을 등지며 화목한 식사를 하는 사람이다. 종수는 그 그림을 마주하는 사람이다. 카메라는 벤의 위치에서 종수를 바라보는 시점과 종수의 위치에서 벤을 바라보는 시점을 교차해 벤과 종수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조한다.
결국 벤의 집에 들어가게 된 종수는 그 곳에서 고양이와 시계를 보게 된다. 그 고양이는 해미가 종수에게 맡긴 고양이가 아닐 수도 있고 맞을 수 있지만 종수는 그 시계가 해미의 것이라고 확신 했으며 고양이 또한 보일이라고 생각해 보일이라고 불렀다. 거기다 우연찮게(혹은 사실이어서) 그 고양이는 보일이라고 불렀을 때 종수에게 안겼다. 벤의 새로운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 벤은 이런 일은 수백 번은 겪었단 듯이 하품을 하는데, 이런 행동은 해미가 이야기 할 때도 한 행동이었다. 비슷하게 반복되는 이 상황은 무수히 많은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팔찌들 중에 해미의 시계가 껴 있는 것과 연결된다. 종수는 해미가 벤이 만난 수많은 여자들 중 일부분이었다는 추측을 할 수 밖에 없다. 해미의 시계가 벤의 집에서 발견된 것과 연관해 그 고양이 역시 해미의 고양이라고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벤이 해미를 죽였다는 명확한 증거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종수의 입장에선 얘기가 달라진다. 종수는 벤이 살인마이길 바라니까. 그는 자신의 믿음에 힘을 불어넣어 줄 증거들을 그의 집에서 모두 모았다. 이제 자신의 영웅서사를 마무리 지을 결말이 필요하다.
종수는 해미와 같이 있다며 거짓으로 벤을 불러낸다. 벤이 진짜 해미를 죽였다면 해미와 같이 있다는 말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랜만에 해미가 돌아온 것이니, 그녀를 보러 벤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종수에겐 자신의 영웅서사를 만족시킬 밑바탕이 필요했던 것이고 해미는 그 이야기를 완성시킬 좋은 재료다. 물론 종수는 해미를 사랑해서 그녀를 찾으려 했다. 허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열등감이었다. 소설을 쓰지 않던 지망생이 자신의 주변인물을 도구로 삼아 써낸 서사. 벤이 죽음으로써 열등감을 무마시킬 영웅서사는 완성되었다. 우물이야기는 그렇게 대체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표현을 성찰하는 것에 대한 은유라면, '해미'라는 영감이 불현듯 '종수'라는 예술가에게 섹스처럼 강렬한 자극을 주고 창작열에 불태우게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불현듯 나타난 해미에게 이끌려 성관계를 맺는 것은 작가가 영감에 이끌리는것과 다를 바 없다. 종수가 해미를 떠올리며 자위를 하는 것과 실종된 해미에게 집착하는 것 역시 창작자가 영감에 이끌리는 것과 같다. 해미를 찾는 과정에서 단서들을 조합하고 그 나름대로의 추리와 결론을 내는 것은 작품의 창작과정과 같다. 하지만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는데, 말하자면 해미의 실종은 영감에 매혹된 자가 창작과정에서 겪는 혼란일 것이다. 그때부턴 자신만의 판단이 중요하다. 종수가 비닐하우스를 찾아 다니며 사라진 해미를 쫓고, 벤을 의심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증거를 통해 결론을 도출해내는 모든 행동들은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관을 만드는 행동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니까 '예술가'는 질문에 대한 탐색을 통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없다고 생각하는 걸 잊는다는 방법이 부재를 메꾸어줄 해미만의 방식이었듯, 무엇을, 어떻게 결론을 도출해낼지에 대한 고민을 통해 작가는 비로소 자신만의 시선과 표현을 구축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겪어 얻어낸 재료들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종수는 해미의 실종이 벤과 연관있다는 여러 재료들을 통해 벤을 죽임으로써 자신만의 작품(우물이야기를 대체 할 영웅서사)을 완성시켰다. 발가벗은 채 걸어가는 종수의 뒷모습엔 이제 막 영혼이 담긴 작품을 완성한 예술가의 모습이 담겼다. 그러고 보니 그는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로 처음 등장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