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은 마트, 파트는 보안팀
스물 다섯 휴학생 신분에 대형마트 보안팀으로 첫 직장생활을 했다.
직장생활을 해 봤다.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직장생활이었다. 아르바이트 같은 직장에 아르바이트 같은 기간이긴했다. 지원도 아르바이트 사이트로 했다. 하지만 엄연히 4대 보험이 가입된 직장이었다. 우리 학교 근처에는 초대형 지하철 민자역사가 있었고 그 안에는 대형마트가 입점해 있었는데, 거기가 내 첫 직장이었다.
나는 보안팀 사원이었다. 대형마트 직접 고용은 아니고 협력사, 즉 하청업체 직원이었다.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일단 일을 시작할 때 쯤 내 재정상황은 거의 파탄나있었다. 동기에게 생활비를 일부 빌렸었고, 후배 활동가 집에 얹혀 사는 수준이었다. 그게 스물 다섯의 내 모습이었다.
나는 그때 학생운동을 거의 그만두기 직전의 상태였었고, 서울 집(전번에 얘기했던 그 반지하 방이었다)을 빼고 군대에 갈 요량으로 본가에 내려갔었다. 그러다가 후배들과 학교가 눈에 밟혀 여차저차해서 아주 잠깐만 도와주다가 다시 돌아갈 생각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지낼 곳이 없었던 나는 무려 3주 가까운 기간을 학생회실에서 기거(!)했다. 그러면서 생계의 대책이 없으니 일주일에 2,3일 정도는 쿠팡 물류센터 알바를 뛰었다. 샤워는 학교 공용 샤워실에서. 세탁은 근처 원룸촌 코인빨래방을 이용했다.(이 꼬라지를 지켜본 한 선배는 한총련 수배시절 활동가 보는 줄 알았다고 후에 평가했다.) 그러다가 결국 거의 발을 뺐었던 학교 운동판에 다시 끌려들어오고 말았고, 선배들과 상의해 급하게 후배와 집을 합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몸과 마음도 망가진 상태에서, 재정대책도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자 어떤 식으로든 당장의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그때 나는 선배들로부터 일자리를 구할 것을 권유받았다. 사실 학생운동가들이 한두 학기 정도 학교에서 활동을 중단하고 취업을 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그 자체도 운동과 학습의 일환이었는데 "노동자의 삶을 경험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우리는 그때 그걸 '공활'이라고 불렀다. 서슬 퍼렇던 시절 대학생들의 위장취업 전통이 이런식으로 이어진 것일까. 물론 너도나도 다들 가난한 운동권들이 한철 쉬면서 노동으로 당장의 생활대책을 마련해두자는 차원도 있었다. 같은 현장(학교, 학생회) 활동가들의 배려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가뜩이나 사람 없는 운동판, 선배 활동가 한 명의 부재는 컸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려운 결심이었고, 당시에 나는 한번 철수했던 단과대 학생회를 불도저같은 기세로 개척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나오는 걸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던 대다가, 정말 돈을 벌지 않으면 큰일이 날 지경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맘을 먹고 일자리를 구했다. 무조건 마트로 찾았다. 대형마트는 21세기의 공장. 웹툰 원작의 드라마 <송곳>을 본 적이 있다면 공감할 지도 모른다. 뭐 그런 이유로 운동권들은 마트에서 일하기를 선호했었다.
나한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였다. 마트 내 입점한 양념육 코너에 지원서를 넣거나, 보안팀에 지원서를 넣거나. 일단 일이 급했기에 둘 다 넣었지만 나는 내심 보안팀을 바랬다. 솔직히 앞치마를 두루고 고기를 썰 자신이 없었다. 마트가 학교 앞이었기 때문에 자주 오가며 봤기에 잘 알던 곳이었다. '노동자가 어쩌고 현장이 저쩌고' 말로 떠들어대던 기세는 어디가고, 솔직히 자신이 없고 무서웠던 맘이 컸었던 것 같다. 먼저 공활을 경험했던 선배는 가공음료 코너에서 일했다는데, 내가 일을 구하던 시절에는 그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보안팀에서 연락이 없다. 면접을 보러 오시라! 과장을 좀 보태 대학 합격장 받았을 때 만큼이나 들떴던 것 같다.
면접을 보러 갔는데 깔끔하고 단정하게 생긴 젊은 남자 팀장님이 나를 맞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마트 보안팀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덩치 산만한 무서운 남성들의 일터는 아니었더라. (물론 나도 전혀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고.) 생각하던것과 다른 이미지에 놀람 반 안도 반으로 면접을 봤다. 거기서는 (1) 내가 가까운 곳에 위치한 4년제 대학의 휴학생이라는 점 (2) (당시 나이) 스물다섯에 아직 군 미필이라는 점을 좀 꺼림칙해 했던 것 같다. 나중에 나보다 한살 위의 야간조장 형에게 술 먹으며 들은 이야기로는 그것 때문에 안 뽑으려고 했다가 사람이 없어서 뽑은 거였다더라. (그래도 일은 제법 잘 해서, 결과적으론 잘 뽑았다는 이야기도 같이 들었다.)
그렇게 일을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한 6개월만 일하고 그만두려고 했는데, 결국 1년 2개월이나 일하게 되었다. 소위 먹물 좀 먹은, 나같은 사람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뭐 "노동자 계급을 대상화하면 안된다"같은 생각으로 그렇게 나와 그들을 맘속으로 구분짓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애당초 그런 구분은 내가 지으려고 하지 않아도 현장에서 은근히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그래서 다른 파트의 직원들은 거의 모르게 했다.) 하지만 일은 생각보다 할 만한데다가 심지어 재밌을 때도 있었고, 무엇보다 일하는 동안 함께했던 동료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로 남았다. 스물 일곱에 입대한 나를 이제 서른을 넘긴 형들은 요새도 아주 가끔 전화를 해 놀리곤 한다. 퇴근하고 그들과 고기를 굽던 시간이 요즈음 문득문득 그리울 때가 있다.
일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합치면 그것만으로 책 한 권 쓸 정도는 될 거다. 나는 거기서 대형마트의 생리와 시스템을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으며, 원청 직원과 하청 직원의 미묘한 갈등관계를 몸으로 배웠다. 그뿐이 아니다. 적어도 네 명의 동네 노숙인을 알게 되었고, 블랙 컨슈머들의 전화 민원을 웃으며 응대할 수 있게 되었다. 수십 명의 고객들 중 주취자와 진상이 누구인지 얼굴말 보고도 판단할 수 있는 관상가가 되었고, 두 명의 절취자를 잡아 그들을 경찰에 인계하는 데 일조했다. (이 이야기들은 나중에 또 자세히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여간 온갖 사건사고를 겪으며 '공활'이라는 처음의 결심은 사라지고 거긴 그냥 내 일터가 되었다. 마트는 정말 온갖 인간군상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거긴 내가 학생운동을 아주 그만두고, 미뤘던 군대를 결심하게 되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날씨가 추워지더니 눈이 내려 쌓이고 있다. 이렇게 쌓이다가는 내일 아침에 제설작업을 해야 할 텐데. 이렇게 눈 내리는 추운 날에는 그때 보안팀에서 일했던 게 생각나곤 한다. 추운 겨울날 유니폼 패딩점퍼를 입고 마트 하역장 근무를 설 땐 내리는 눈을 구경하면 시간이 빨리 가곤 했다. 나는 가을에 입사했고, 두 번의 겨울을 보내고 나서야 '시큐리티 조끼'를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