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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우 Dec 29. 2021

안마의자 판매사원 여사님 이야기

그녀와의 대화라면 30분 근무는 쏜살같이 지나갔다.

  마트 보안팀은 밀어내기식 순환 근무를 했다. 한 근무지에서 30분 근무를 서고 교대근무자가 나를 밀어주면, 그다음 근무지로 가서 그 위치의 근무자를 밀어내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보통 한 시간 반(3개 근무지) ~ 두 시간(4개 근무지) 정도를 근무하고 30분 정도를 쉬는데, 한 네 바퀴 반 정도를 돌면 퇴근시간이 왔다. 이 근무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근무시간이 엄청나게 빠르게 흐른다는 것이었다. 같은 근무지가 연속되지 않으니 지루하지 않아서 좋았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 근무 개월 수가 늘어가자 그마저도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아주 가끔, 황당한 이벤트가 발생해 사람을 당황시키는 게 아니면 특별할 일 없이 매일 같은 일이었다. 절취 의심자가 발생을 해도, 무빙워크가 갑자기 멈춰도, 심지어 미아가 발생을 해도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별 일 아니게 되었다. 이런 일들은 매뉴얼대로 대처만 하면 큰 사고 없이 잘 해결되는 아주 잦은 일이었고, 선배 사원들 역시 이런 일로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익숙한 일들의 연속은 사람을 지루하게 했고,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시간을 빨리 보낼 수 있을까 나는 내 나름의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런 내 앞에 조력자로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안마의자 판매사원이었다. 가전매장 입구 앞에 아웃바인드(계산대 바깥에 특별히 가설하여 만든 매대를 그렇게 불렀다.)로 입점한 안마의자 업체의 파견사원인 그녀는 40대 후반 정도의 여성이었다. 보통의 경우 마트에서 일하는 여성 직원들의 나이는 대부분 30대 후반 ~ 50대 초반 정도로 수렴하는데, 그래서 대개 직원들 간 소통할 때는 호칭을 00 여사님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사이에서 ***(안마의자 업체명) 여사님으로 불렸다. 나는 사실 이 호칭에 거부감이 좀 있었는데, (기혼) 여성을 호칭하는 표현으로서 '여사'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운동권이었던 내게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뭐, 당시로서는 "이곳에 순리에 그대로 적응하자. 따지고 가르치려 들지 말고."란 생각이 강해서 나도 그렇게 불렀다.


  여하튼 여사님이 근무하는 곳은 우리가 근무하는 위치와 붙어있었고, 가전매장 앞 근무를 설 때면 우리는 서로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그녀와 대화를 하다 보면 30분은 훌쩍 지나갔다. 나뿐만 아니라 보안팀 사원 대부분은 그와 가깝게 지냈다. 그분은 내가 예의 바르고 착실하다며 유독 나를 아껴주시기도 했다. 그래서 나 역시 그녀를 좋아했다. 간혹 근무 중에 잘 안 되는 스마트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도움을 청해 와 날 곤혹스럽게 만들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내 짧은 휴식시간을 나눠서라도 도움을 드리곤 했다. 물론 서서 하는 근무, 옆에서 도와드릴 수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매번 근무 설 때마다 여사님과 잡담을 하는 우리의 모습을 관리자들은 탐탁지 않아했기 때문에 눈치를 살펴야 했다.(우리 근무지는 가장 취약지역이기도 했기 때문에 보지 않으려고 해도 상황실 CCTV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궁색하지만 변명을 좀 보태자면 나는 일에도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업무에 지장이 되지 않는 선에서 대화를 나눴고, 아예 내가 주시해야 할 곳에서 시선을 돌려 도움을 드릴 일이 있는 경우에는 쉬는 시간에 돌아와 도와드렸다. 


  여사님은 좋은 사람이었다. 군대를 가야 한다고 하니 따듯한 위로를 건네주었고, 때때로 작은 간식거리들을 건네주었다. 원래 규정대로면 직원들에게 아무것도 받으면 안 되긴 하는데, 다른 직원들이 뭘 줘도 절대 받지 않았지만 이 분이 주면 받았다. 그분은 가끔 나보다 조금 어린 당신 아들 이야기를 했고, 어렸을 때 당신 가족 이야기, 고객 관리 이야기 등등 사는 얘기를 내게 나눴다. 나는 자취 6년 차의 살림 이야기를 했고, 늦은 나이에 날 가진 엄마에게 내가 얼마나 불효자식인지 이야기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공감하며 웃었다. 그리고 경력과 연륜에서 나오는 절륜하고 탁월한 조언을 주었다. 동시에 내 미래를 격려하고 응원해주기도 했다. 그런 여사님은 자신의 일과 업무에도 충실했는데, 안마의자 판매라는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특유의 고객관리 능력 실로 대단했다. 그렇게 대당 기백만원 하는 안마의자의 판매를 한 달에도 십여 건 성사시켰고, 그런 날이면 표정이 환했다.


  입대일자를 받고 사직서를 제출하니 마지막 출근 일자가 정해졌다. 소식을 전하자 여사님은 아쉬워하면서도 언제든 더 잘 될 거라고 나를 응원했다. 그대로는 서로가 아쉬웠기에 매장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를 함께 했다. 여사님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그 식사자리. 입대 전 신상을 정리하며 나는 학생운동을 그만두기로 완전히 결심을 하고, 이미 학교 선배를 만나 식당에서 펑펑 눈물을 쏟으며 운동권과의 결별을 선언한 터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신뢰와 정이 바닥나 내린 결정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1년 같이 근무한, 사실 남이라고 해도 무방할 어떤 중년 여성 덕에 내 생각이 조금이나마 바뀌었던 것 같다. 매장을 지키는 시간이 수익과 연결되는 판매사원이, 기꺼이 자리를 비우고 내게 대접한 그 밥 한 끼에는 12월의 한기만큼이나 얼어붙었던 내 맘 한편을 녹여내는 어떤 무언가가 있었다.


  입대 후 5개월 만에 나간 첫 휴가 때 나는 음료 한 박스를 들고 매장을 찾았다. 여전히 여사님은 그대로였다. 입대 한 아들 휴가 온 것처럼 나를 반겨주는 당신 덕에 기분이 들뜨고 좋았다. 여사님과 그 식사를 한 게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언제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2021.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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