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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굽쇠 Jun 02. 2023

관대함을 가로채는 사람들

관대함을 도둑맞은 사회

   살면서 관대함은 나에게도 사회에도 꼭 필요하다. 나에게 관대함이 있어야 자학하지 않고 자존감을 지킬 수 있고, 사회에 관대함이 있어야 각종 갈등과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관대함의 범위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사회가 건강하고 따뜻하게 돌아가려면 반드시 존재하되 너무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아야 하는 비타민 같은 요소다.


   보통 관대함은 자신이 타인에게 베푸는 방식으로 나누어진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에게 베푸는 관대함을 먼저 가로챈다. 본래 관대함은 수혜적으로 받는 것임에도 자신이 응당 받아야 하는 것인 양 뻔뻔하게 이를 요구한다. 오히려 관대함을 베풀지 않는 상대를 비난하고 해를 입히는 적반하장으로 나오기도 한다. 막상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에게 관대함을 베풀지는 않는다. 관대함은 오로지 자신만 받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런 사람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지능이든, 사회성이든, 감수성이든, 도덕관념이든, 자기성찰능력이든, 자기통제력이든 어느 하나 이상의 영역에서 큰 결핍을 보인다. 그래서인지 자신에 돌아오는 피드백이 어떠할지를 생각하지 않고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거나 자기 행동에 상대가 반발하면 상대방에게 쉽게 폭언과 폭행을 가한다. 그리고 상대로부터 관대함을 게걸스럽게 약탈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불러올 영향을 고려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그렇기에 이런 사람들과 최대한 엮이지 않고자 이런 사람들의 각종 민폐에도 조심스럽게 피해가거나, 제도나 규칙이 허락하는 수준 안에서 대응한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정상적이고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가짜 관대함’이다. 실제로 타인들이 이 사람들을 용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에게 베풀 관대함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빈곤한 이들이기에, 타인으로부터 강탈한 가짜 관대함을 굳은살이 박인 자신의 양심에 억지로 먹이며 살아간다.


   하지만 비옥한 흙밭과 달리 메마른 자갈밭은 물을 아무리 부어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흘려보내듯이, 이들이 갈취하는 가짜 관대함으로조차 주린 정신을 채우지 못한다. 이들은 항상 굶주리고 예민한 상태에서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관대함을 탈취하기 위해 사회적인 유목 생활을 한다. 그리고 또 누군가를 만나 관대함을 얻어내지만 금세 사라지고 마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관대함을 빼앗기는 사람들은 가만히만 있는가? 아닐 것이다. 부드럽고 따뜻한 관대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차갑고 딱딱한 ‘책임’이 들어선다. 위와 같은 ‘약탈자’들이 이미 관대함을 훔쳐갔기 때문에 이들은 더 이상 관대함을 베풀지 않는다. 대신 약탈자들에게 법적, 경제적, 사회적 책임을 지우고 요구한다. 여기서 책임이란 다양한 형태가 될 수 있다. 형사적 처벌이 될 수도, 민사적 배상이 될 수도, 사회적 비난을 통한 명예의 실추가 될 수도, 주변인으로부터의 거부와 배제가 될 수도, 물리적 저항이 될 수도 있다. 설령 원하는 만큼 정당한 책임을 지우지 못하더라도, 약탈자들이 이를 거부하고 발광하더라도, 최소한 관대함으로 이들에게 본의 아닌 면죄부를 주지 않겠다는 각오다.


   하지만 한 번 도둑맞은 관대함이 쉽게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에, 사회 전체적으로는 관대함의 총량이 점점 줄어든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쉽게 관대함을 베풀기를 주저한다. 관대함을 베풀지 않는 것이 현명하게 여겨지고 관대함을 베풀려다 도리어 약탈당한 사례가 괴담처럼 확대 재생산된다. 예전이라면 관대함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경계선에 있는 문제들도 이제는 법과 제도의 칼로 썰어야 하는 문제가 된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모두가 더 많은 수고와 비용을 들여야 하는 점이 안타까운 것이다.


   우리나라는 과거 관대함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내 기준으로는 과잉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런 관대함을 악용하고 독점하려는 탐심이 각종 사회 문제를 일으켰고,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관대함 대신 법과 제도로 문제를 다루려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관대함이라는 명목 하에 추상적이고 모호한 기준으로 문제를 다뤘던 잘못된 관행들이 고쳐진 장점도 있다. 하지만 법과 제도가 완벽하지 않고 완벽할 수 없기에 그 틈을 파고들어 또 다른 이득을 취하려는 신종 약탈자들이 생겼다. 그리고 이들로 인한 또 다른 피로감이 생겨났으니 이러나저러나 괴롭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사회가 이렇게 각박해지고 답답해진 데는 깨진 유리창 이론처럼 타인이 존중하고 지켜오던 ‘관대함의 룰’에 몇 개의 돌을 던진 약탈자들의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들은 자기 주변으로부터 약간의 관대함을 빼앗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약탈한 관대함의 몇 배, 몇십 배, 몇백 배가 넘는 관대함을 사회로부터 증발시켰다. 그로 인해 자신들이 피해를 보는 것이야 사필귀정이라 할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무고하게 피해를 보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맘 같아선 그러한 약탈자들에게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으면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러기 어려우니 또 한 번 갑갑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관대함을 잃지 않은 채 자신과 주변을 밝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약탈자들이 세상을 어둡게 하는 가운데 여전히 빛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찌 보면 그들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대단한 사람들이다. 관대함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비용이 들게 된 요즘까지도 묵묵히 이를 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 사회가 하나의 모니터고 각각의 구성원들이 LED 픽셀이라 한다면, 여기저기 픽셀이 고장 나 꺼져가는 와중에도 자기 자리의 빛을 꿋꿋이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직 우리 사회가 볼만하게 밝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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