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혹시 서경덕 교수님 아세요? 교수님이 항일역사 유적지 기획여행을 준비하시는데 같이 해보시는 건 어때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여행기자에게 연락이 온 것은 2018년(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1년 앞둔) 어느 날이었다. “항일역사 유적지가 뭐지??”란 생각도 잠시, 평소 매체를 통해 알고 있던 유명한(?) 교수님과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에게는 전혀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렇게 약속 시간을 잡고 성신여대에서 교수님을 만났다. 여행 전문가라고 자부했던 나조차도 당시에는 조금은 생소한 개념의 [다크투어리즘]에 대한 이야기를 교수님으로부터듣게되었다. 그러면서 항일과 관련된 유적지가 국내외에 정말 많다는 사실도, 그 의미 있는 장소들이 우리들의 '무관심' 속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크투어리즘의 사전적 의미
뜻하지 않은 죽음과 재난이 발생했거나 역사적으로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곳을 직접 방문해 자기반성을 하고, 교훈을 얻기 위한 여행
조금은 무거울 수 있는 이 주제로 여행을 한다는 것이 아직은 낯설었지만, 유명인과 여행한다는 기대감(?)으로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서경덕 교수님의 “항일역사 탐방 프로젝트”
그동안 국내지역으로는
우리나라 최대의 강제징용 장소 옥매광산이 있는 해남,
일본의 적산가옥과 수탈의 흔적이 남아 있는 군산, 목포,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최후의 방어지 제주도,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일본의 국권침탈이 시작되었던 인천, 강화,
항일의 섬 소안도,
그리고 대한민국 영토 독도를 다녀왔고
국외지역으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시작 상해,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거 장소인 하얼빈,
대한민국 마지막 임시 정부 중경,
윤동주의 흔적과 재일교포의 아픔이 진행 중인 교토와 우토로마을,
3.1 만세운동보다 먼저 일어난 2.8 독립 만세운동의 시작지 도쿄,
조선인들에게는 지옥의 섬, 일본인들에게는 천국의 섬이었던 군함도(나가사키)를 다녀왔다.
코로나로 인해 3년간 잠시 멈춰있었지만 정말 가열차게 달려왔던것 같다.
잊힐 수 있는 아픔의 장소를 방문하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을까?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은
‘너무 몰랐다(무관심)’
에서 오는 미안함과 잊고 있었던 분노였다.
이 감정의 중심에는 바로 ‘무관심’이라는 단어가 있다. 무관심이 관심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나는 물론이고 내 주변 사람들이 해당 장소를 지속해 방문하여야 한다.
그렇다고 여행 자체가 무거울 필요는 없다. 그냥 우연히든, 그렇지 안 든 그 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잠깐이라도 그 장소에서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한 번쯤 되새기면 된다.
많은 사람이 여행의 목적으로 파리를 방문하지만 파리 한복판에 있는 김규식 선생님의 하숙집을 알지 못한다. (38 Rue de Châteaudun paris)
김규식 선생님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의 만행과 우리의 독립을 지속적으로 알렸던 분이다. 이런 김규식 선생님의 활동을 보고 감동한 인물이 바로 베트남 출신의 독립운동가 “호치민” 이었다.
특이하게도 한반도나 중국 대륙·미국이 아닌 타이완 섬에서, 그리고 총이나 폭탄이 아닌 도검을 이용하여, 일본 제국의 국구(國舅)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왕 암살을 시도했다.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 장천리 태생#으로 젊었을 때는 황해도 신천군 군청서기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6년 6·10 만세 운동과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의거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범을 잡기 위해서는 범의 소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일단 일본으로 건너가 아키가와 도미오(明河豊雄)라는 가명을 쓰면서 오사카에서 전기제작소의 직공, 메리야스 공장 노동자, 상점원 등으로 일하고 밤에는 상공전문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일본에서 뜻을 펼 마땅한 기회가 오지 않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려는 목적으로 일본을 떠났다. 1927년 11월 기착지인 타이완 섬에 도착했다가, 바로 상하이로 가는 것이 여의치 않아 타이중에 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찻집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타이완 섬의 항일운동가들과 손을 잡고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1928년 5월 일본의 국구(쇼와 일왕의 장인이자 고준 황후의 친정아버지)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이 육군 특별검열사로 대만에 파견된다는 보도를 접하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조명하 의사는 5월 14일 타이중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구니노미야가 탄 차에 뛰어올라 독을 묻힌 칼을 집어던졌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칼이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치고 운전사 등을 찌르는 데 그치면서, 구니노미야는 대만 일정을 예정대로 모두 소화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체포 직후 촬영된 조명하의 머그샷. 왼쪽은 한국 연구진이 대만에서 새롭게 발견한 사진이다. 체포 후 일제의 고문 및 폭행 등에 의해 얼굴이 부은 모습으로 보인다.
조명하의 암살 시도는 일본 내에서 ‘7월 불경 사건’으로 불리며 대서특필 되었다. 이 사건으로 당시 대만 총독 가미야마 만노신(上山満之進)이 사임했으며, 이후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야마나시 한조가 조선인 '관리' 및 후속 조치 미흡으로 사임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한편, 구니노미야는 사건 이후에도 공무를 계속하다가 이듬해 1월, 온천을 즐기기 위해 아타미로 이동하다가 맹장염이 발병했고, 급히 도쿄로 후송되었으나 패혈증으로 사망하였다.
비록 미수에 가까웠던 의거였지만 천황 일족을 타겟으로 삼았던 점과 의거로 하여금 일본 정치 및 여론을 뒤흔들었던 의의는 이봉창과 김지섭 등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체포된 조명하 의사는 심한 고문을 받다가 1928년 7월 18일 타이완 고등법원 법정에서 열린 특별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그의 나이 향년 2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