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거대해
"루디 씨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세요. 아주 작은 것이어도 좋고 생산성 없는 일이어도 좋아요. 오히려 생산성이 없는 일들이 더 좋죠.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생각만 해 오셔도 돼요."
상담 2회에 걸쳐 선생님은 나에게 '행복하게 만드는 것' 들을 생각해 보라고 권유했다. 선생님은 숙제라는 말을 꺼냈다가, 다시 안 해도 되지만 그래도 해 보면 좋을 생각이라는 말로 순화했다. 리스트를 적어 오라는 숙제를 내면 나는 또 그 압박에 시달리며 다음 상담 회차까지 머리 싸매고 살 것임을 짐작하셨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행복이 뭐 어디에 있어, 싶었고 그 다음에는 생각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 기분을 나아지게 만드는 것' 리스트는 거품 퐁퐁 쌓인 욕조 안에서 반신욕을 하며 탄생했다.
사실 첫 번째 제목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 이었다. 감각이 무뎌진 나에게 행복이라는 감정은 굉장히 오래 전 느꼈던 것에 불과했다. 도대체 무엇이 행복인지, 언제가 마지막 행복이었는지, 어떤 기준에 행복이라는 것을 두어야 하는지 모호한 상태에서 그 제목은 나에게 굉장히 거대한 괴물 인형처럼 다가왔다. 나를 해치지는 않는데, 거대하고 버거운 느낌. 나에게 있어 행복이란 아주 최고의 기쁨이 유지되는 상태인데 도대체 언제가 그랬을까. 드물게 기분이 좋아져도 '오늘 참 좋다' 정도에 그쳐 왔는데.
목욕물이 차갑게 느껴질 때까지 고민은 계속되었다. 결국 주제를 조금 바꿔 보기로 했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조금 더 가볍게. 그렇게 '내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것' 이라고 수정했다가, 또 이런 것들로 인한 기분의 상승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그 순간만을 아주 잠깐 밝히기 때문에.. 최종 제목은 '내 기분을 나아지게 만드는 것' 이 되었다. 밈처럼 써오던 (이게진짜)최종의 최종_진짜최종.ver 의 탄생 과정을 보는 것 같았다. 사실 '내 기분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드는 것' 이라고 쓰려다가, 너무 자기연민에 취해 지내는 사람 같아서 '조금이라도' 라는 단어는 지웠다.
그렇게 하니 조금 가벼워졌다. 늘상 우울의 바다 속 저 심해에 가라앉아 있거나 해파리처럼 고요히 유영하다 지면으로 쓸려가버리는 극단적인 그래프 사이, 약과 상담과 주변 환경과 시기의 도움을 잘 받은 나의 평소 기본 상태는 0, 없을 무에 가깝다. 당장 내일도 예상할 수 없고 하루하루 연명하며 무의미한 하루하루의 연속, 그렇지만 큰 사고 없이 무사히 눈을 뜨고 눈을 감는 날들. 크게 흔들리지 않는 이런 날들은 0에서 +10으로 갈 때도 있고 -10으로 갈 때도 있지만 그래프의 양끝처럼 극단적인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폭풍의 눈과도 같은 이런 일상적인 날들을 기준으로 잡고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런 무의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내 기분을 +10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들은 뭐가 있을까. 비록 그것이 몇 초 안 되는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만약 리스크가 있다면 리스크를 정리해 놓고 그냥 툭 터놓고 한 번 써보자. 그래서 아래와 같은 사족 많은 리스트가 만들어졌다.
'내 기분을 나아지게 만드는 것'
1. 좋아하는 목욕/세안용품 챙겨서 아주 오랫동안 거품목욕 하기.
2. 귀엽고 예쁘고 쓸데없는 것 사기. 특히 스누피. (스누피는 15년 동안 좋아해온 캐릭터다)
- 리스크 1 : 소비 행위에 대한 감흥이 옛날보다 많이 떨어진다. 사서 포장 풀면 딱 그 순간뿐. 허무하다.
- 리스크 2 : 자잘하지만 나중에 모아 보면 타격이 큰 소비를 많이 하게 되는 단점이 있다.
3. 이웃집 강아지를 포함, 모든 귀여운 동물들과 친해지는 것. 서로 신뢰하는 눈빛으로 마주보는 것.
4. 향수, 룸스프레이, 입욕제 등 내 취향의 좋은 향기가 나는 모든 물건들.
5. 마음의 짐, 거슬리는 것, 할 것을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하나도 없을 때의 해방감, 안도감
6. 예상치 못한 선물이나 호의를 받을 때. 낯선 사람, 아는 사람 모두 상관 없음
7.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칭찬을 들었을 때
8. 진짜 진짜 정말 좋은 음악을 들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찌릿한 충격
9. 진짜 진짜 정말 좋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난 뒤 여운에 젖어 장면마다 분석하고, 리뷰하는 것
10. 좋아하는 젤리 사서 먹기
- 리스크 1 : 체중, 몸매 강박 때문에 도리어 이것 때문에 살이 찌면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다.
11. 하루가 견딜 만한 속도로 빨리 지나가 버리는 것
12. 코인 노래방에서 혼자 좋아하는 노래들 부르기
13. 엄청나게 맛있는 케이크나 상큼한 음료를 마셨을 때
- 리스크 1 : 먹고 싶을 때 먹어야 한다. 먹고 싶지 않을 때 먹으면 오히려 더부룩하고 불편하다.
14.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사람이 별로 없고, 목적지까지 처음부터 앉아서 쾌적하게 갈 수 있을 때.
- 리스크 1 : 이것은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날 경우가 적은 최적의 환경이다.
이런 환경이 제공된다고 해서 증상이 100%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15. 어디든 시끄러운 소리가 없고 부산스럽지 않으며 적당히 정적이고, 아무도 서로 신경쓰지 않을 때.
16. 혼자서 모르는 동네, 혹은 아는 동네 돌아다니기.
- 리스크 1 : 체력이 떨어져 집에 돌아갈 때 굉장히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17. 남에게 도움을 주거나, 호의를 베풀거나, 선물을 주었을 때, 받는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볼 때.
사실 열 개는 넘을까 싶었는데 열 일곱 개씩이나 작성해 버렸다. 선생님께서도 퍽 놀란 눈치였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하고, "어차피 오래 지속되지 않을 텐데 무슨 소용이 있어?' 라는 생각은 자꾸 생각에 벽을 만들길래 '나아지게' 라는 단어로 대체했다고 말했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기분이 나아지는 것은 큰 차이가 있으니까. 선생님은 잘했다고 말해 주셨다. 동시에 1번 2번에 리스크까지 작성해서 리스트 형식으로 뽑아와 놀라셨다고. 그건 어쩔 수 없는 내 천성 같았다. 아무리 그런 강박들 때문에 지금까지 시달려도 결국은 내 편의를 위해, 내 기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
일 주일에 한 번 반신욕을 하고, 좋아하는 매장에 가서 스몰 토크를 하며 입욕제와 비누 같은 것들을 사고, 가끔 돈 모아 향수도 사고. 가끔 여유와 체력이 된다면 병원이나 우리 동네 주변을 돌아 보기도 하는 그런 삶. 매일마다 아파트 단지에서 조금 내려가면 있는 이웃집 마당개 (날 너무 좋아해준다) 를 만나서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사랑을 주고 더 큰 사랑을 받고 힐링하는 삶. 병원이 끝나면 근처 코인 노래방에 잠깐 들어가 좋아하는 노래 딱 네 곡을 부르고 다시 나오는 삶. 지인들의 생일 선물을 챙기고, 지인들이 주는 선물을 받고, 그러는 삶. 그런 거. 한 순간일 뿐이지만 그래도 하루에 잠깐 빛이 드는 틈이 생긴 것이니 눈 앞에 놓인 하루를 살아내는 동안 조금의 힘이 되겠지.
나는 아직까지도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서 살아가는 에너지를 얻는지, 왜 살아가는지, 목표의식은 어떤 에너지에서 나오는지.. 등을 궁금해하지만, 당장의 내일도 생각할 수 없는 나는 지금 위에 서술한 저 정도의 삶이 아직까지는 내가 견디고 버틸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인 것 같다. 저렇게 소소한 미소를 내게 줄 수 있는 것들조차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나는 살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최근 재미있게 보았던 <어둠 속의 미사> 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다음 포스팅의 내용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