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잡아먹으러 왔나? 놀라기는 왜 놀라는 게요?”
여자는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깐다. 자기 몸을 바치는 체념이 아니다. 사내의 마음을 체념하는 것이다.
- 2부 2편 8장 심장을 쪼개어 바치리까 中
길상은 멋진 사내다. 그는 가히 용정 최고의 신랑감으로 뭇 아가씨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며, 공노인도, 곡물상 은씨도 사윗감으로 탐을 낸다. 그런 그가 스물여덟. 혼기를 꽉 채우다 못해 노총각이라 불리도록 아직 짝을 찾지 못했다. 윤씨부인에 대한 의리, 유부남 상현에 대한 견제라는 명분으로 굳게 덮여 있어 그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의 마음은 오롯이 서희를 향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상전으로 모셔왔던, 강한 기질을 타고났지만, 한 순간에 어미를 잃어 너무나 가여운 처지가 되었던, 그녀를 달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고, 한 번 웃는 것을 보기 위해 무엇이든 만들어 주고 싶었던 그녀.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고, 그들 삶의 무대도 하동에서 용정으로 바뀌었건만, 신분의 차이는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존재하기에. 길상은 감히 “아씨”와 함께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레 서희와 길상을 엮기 시작한다.
연적이라고 할 수 있던 상현이 그에게 포문을 열었을 때, 길상은 분명히 대답하지 못했다. 상현이 용정을 떠나고 나니 길상의 마음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그럼에도 서희 쪽으로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는 현실에, 무엇인지 알지 못할 마음이 끓어오르고, 종살이를 더는 아니하겠다. 떠나야겠다. 하면서도 그녀의 곁을 끝없이 맴돌고 있다.
그런 길상에게 옥이네는 배출구다. 자신도 마주하지 못한 감정의 쓰레기들과 욕정을 해소하는 배출구. 고생에 시든 것 같았지만 예쁜 얼굴, 옥이네는 남편을 잃고 용정의 재봉소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여자다. 용정 대화재로 더 이상은 일할 곳이 없어져 어린 딸 옥이와 함께 회령으로 향했다. 끼니를 거른 것은 옥이나 그녀나 마찬가지였을 텐데, 옥이는 울고 떼를 쓰며 배고픔을 솔직히 드러내서 길상이에게서 파적을 얻어먹지만, 옥이네는 그런 상황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타인의 이유 없는 도움을 거절한다. 아마도 “자연” 그 자체 임이네였다면 다른 태도였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욕구인 배고픔 앞에서도, “자연스럽지 않은” 사람의 도리와 사상이 심어준 수치심을 가지고 있던 반듯하고 단정한 옥이네.
그녀는 회령의 한양여관에서 일하게 되고 그곳에서 겁탈을 당할 뻔했으나 길상과 송장환이 그 상황을 모면하게 해 주었고 그것이 연이 되어 길상이 건네준 이십 원으로 옥이와 함께 살아갈 집을 구하고. 삯바느질을 시작할만한 겨를을 얻게 된다.
겨를… 시간적인, 경제적인 여유. 어린 자식이 당장 몸을 누일 곳이 없고, 그 입에 들어갈 양식이 없을 때. 엄마들은 무슨 일까지 할 수 있을까. 옥이네가 한양여관에서 일자리를 달라고 주인에게 애걸복걸할 때,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해줬다는 이유로 겁탈을 당할 뻔한 그녀에게. “설마 여염집으로 잘못 안 건 아니겠지?”라며 당당하게 나오는 주인 여자의 태도는 가스댁을 향한 세상의 냉혹한 모습을 담고 있다.
‘남편도, 지위도, 돈도 없는 여자. 무려 애까지 딸린 너를 일 하게 해 준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큰 “은혜”를 베풀었는데, 네 한 몸 지키자고 내게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되지!’
엄혹한 세상에서 만난 한 줄기 빛 같았을 길상. 그가 내민 이십 원은 딸과 함께 지낼 작은 집을 마련하고, 일자리를 구해서 수입을 손에 쥐기 전까지 자식의 입에 들어갈 양식을 살 “겨를”을 마련할 수 있는 돈이었다. 길상의 호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옥이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밤 찾아왔을 길상은 어떤 존재였을까.
옥이를 재운 후 몸을 요구하는 그가 꺼려졌을까? 반가웠을까? 조금이라도 빚을 갚는 기분이었을까? 그들의 만남이 길어질수록 누구나 탐내는 옥골선풍의 그가 어느 순간은 좋아지지 않았을까? 생계를 위한 바느질을 하면서 옥이네 역시 그를 생각하고 세 식구로 함께 할 미래를 꿈꿔 보지 않았을까.
길상은 혼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과부장가들겠다는 말을 하고 다녔으니, 아마 옥이네에게도 그 소문이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매번 밤손님처럼 찾아와 몸을 섞고도, 정작 자신에겐 미래를 약속하는 말 한마디 없으니, 염치 바른 그녀는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그의 방패구나. 결혼을 하고 싶지 않은 그가 사용하는 방패. 몸은 요구하지만 미래를 약속하지는 않는 남자. 그는 나에게 마음이 없다. 길상을 바라보던 옥이네의 마음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한다. 그의 곁에 머물고 싶은 마음에 유혹이라도 하는 순간, 그 남자가 아예 사라져 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사내의 마음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해 버렸다.
나는 체념하는 옥이네의 처지가 아프다.
길상의 일탈 상대이면서도 그에게서 손톱만큼의 존중도 받을 수 없었던 춘일관의 작부 화심이가 가엾다. 김두수와 엮인 서울댁과 금녀의 삶이 슬프다. 자식들과 먹을 보리밥 한 덩이를 위해 치마를 걷어 올려야 했던 임이네의 그 무서운 과거가, 조준구와 삼수에게 유린당하던 삼월이의 그 비통한 세월이… 너무나 애처롭다.
어디를 가나 존중받는 서희와는 달리(서희는 유서 깊은 가문과 재산이라는,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두 개의 기둥을, 태어나는 그 순간 이미 손에 쥘 수 있었다.), 조상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딸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가난했고, 충분히 배울 기회가 없었고, 인생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고, 그래서 결국 나락으로 떨어져야 했던 수많은 여자들…
나는 우리 사회가 어려운 상황에 내몰린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이 가진 고유한 날개를 펼쳐 날아오를 수 있는 탄탄하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 수 있기를… 각자도생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꿈꾸며 이루어가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