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속 인물들. 토지 5권.
나는 그대를 그리워하고 그대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 우리가 혼인을 못하는 이유는 그대에게 있고 내게 있는 게 아니다. 하니 그 보상은 그대가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나와 같이 겨루려 하는가? <5권 13장 법회>에 서술된 서희의 생각입니다.
상현을 향한 그리움을 인정하면서도, 그 관계를 발전시킬 의사가 전혀 없는 서희의 마음이 엄정하게 드러난 글이었어요.
서희는 둘 사이에 명확하게 그어진 한계를 지킬 생각이며, 그로 인해 치러야 하는 상처는 상현의 것이어야 한다는 서희의 셈도 들어있습니다.
서희를 바라보는 상현의 관점은 <4권 15장 귀국>에서 살짝 나옵니다. 부산에서 청진까지 화륜선을 타고 올 때의 장면입니다. 거친 파도로 인해 서희는 심한 뱃멀미를 했고, 월선의 도움을 받아 비틀거리며 속을 게워내는 서희를 보며, 남녀가 유별한 터라 지켜야 할 것이 많아(이때 상현이 김훈장을 힐끗 쳐다본다는 묘사가 나옵니다. 존재 자체가 “관습의 아이콘” 김훈장님입니다.^^) 서희를 돕지도 못하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던 상현은 ‘한 배를 탔어도 서희는 천 리 밖이로구나. 이러다가 파선이라도 된다면 나는 서희를 꼭 껴안고 죽으리라.’라며 제 속마음을 토해냅니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아직 청진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서희와 동행한 지 단 며칠 만에 그녀와 함께 죽겠다는 마음이라니...?! 4권 18장에서 “서희가 간도로 가겠다는 결정을 내린 후 이부사댁의 상현은 동행할 결심을 굳혔다.”라는 글은 이미 서희에게로 기울어졌던 상현의 마음을 대변하는 의미심장한 문장이었나 봅니다.
상현을 갈망하게 된 서희의 이야기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습니다. 1부 5편 18장에 기술된 대로 상현의 영롱한 눈빛, 냉정한 의지를 품은 얇삭한 입술, 오똑하니 날이 선 코, 양반 특유의 자부심이 넘치는 태도와 날카로운 성품의 결이 서희의 눈에 들고 마음에 맞았던 거겠지요? 아마도 할머니인 윤씨부인이 상현을 몹시 사랑하여 자신의 배필로 탐을 내었었다는 그들 사이의 역사가 가장 큰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서로를 갈망하지만 이루어질 수는 없는 사이인 두 사람은, 용정으로 이주 이후 3년 동안 감정의 평행선을 그리며 팽팽하게 대치합니다. ‘어쩔 수 없는 강을 끼고 맴을 돌면서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입히며 서로의 애정을 학대하며 마음을 엄폐할 수밖에 없는 처지’(2부 1편 16장)라고 묘사된 부분을 읽다가, 문득 윤씨부인과 김개주의 관계도 이와 같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씨부인과 김개주의 관계가 저는 항상 궁금했었거든요.
바우할아범의 말에 의하면 윤씨부인은 겁탈을 당했고, 그 때문에 목을 매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김개주를 향한 마음은 치를 떠는 원한과 미움이었을 텐데… 김개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나, 동학난 때 윤씨부인을 찾아온 김개주와의 독대 장면을 보면, 원한에 사무친 사람의 태도라고 보기엔 뭔가가 달랐어요. 심지어 김개주는 형님인 우관선사에게 그녀를 사모했다고 말했었구요.
윤씨부인과 김개주의 젊은 날에도, 그 사연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뭔가가(Something이) 있었겠구나. 시선의 마주침이 있었고, 그 시선을 넘어서는 갈망이 있었고, 그러나 윤씨부인은 서희와 같이 그들 사이에 있는 한계(일부종사, 어린 아들, 가문을 지켜야 할 처지)를 명확하게 알았기에 그 선을 넘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김개주는 상현과는 달리 격정에 못 이겨 그 선을 넘어버렸던 거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씨부인이 살아온 삶에서 서희가 보이고, 서희의 삶에서 윤씨부인이 새롭게 해석됩니다. 인간의 삶은 이렇게 시간을 넘어서도 연결되고,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