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먹눈 - 함안댁

-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속 인물들. 토지 2권.

by 청록펜

“나도 시집올 적에는 다 혼인 잘한다고들 했지.”


함안댁의 친정은 중인, 평산의 집안은 몰락하긴 했으나 양반입니다. 문벌이 낮은 집에서 문벌이 높은 집으로 하는 혼사를 “치혼사(앙혼仰婚)”라고 하는데, 함안댁은 치혼사하여 평산과 맺어졌습니다.

딸을 양반 집안으로 보내면서 친정에서 짓덕(시집가는 딸에게 지참시키는 토지)을 많이 마련해 주었으나, 씀씀이가 헤픈 평산은 금세 다 털어버렸으며, 가솔들의 생계는 함안댁이 온전히 책임지고 있습니다. 치혼사의 반대말은 낙혼(落婚)입니다. 격을 떨어뜨린 결혼. 낙혼은 평산이 함안댁을 평생 업신여기며 제 마음대로 학대하고 끊임없이 괴롭히는 이유가 됩니다.


함안댁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 봅니다. 마을 아낙들이 모이면 옛이야기들을 곧잘 풀어놓곤 하던 그녀는 아마도 어린 시절 책을 좋아하는 문학소녀였을 것입니다. 남들이 다 잘한다고들 하는 혼사를 치르고, 시집와서 겪게 된 일상은 상상과는 다른 것이었을 테지만, 그 상황에서도 그녀는 어린 시절 이야기 책에서 읽었던 현부인을 본받으려 했고, 부덕을 닦는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양반 집안의 안주인이라는 자부심은 함안댁의 마음을 지켜주는 큰 기둥입니다. 평산의 게으름과 무책임함도 “상사람들과는 다른 신분”이기에 “시절을 잘못 만나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한”이라고 해석하여, 못난 가장을 하늘로 여기며 그를 위하여 입에 맞는 찬과 깨끗한 의복, 정갈한 버선을 항상 준비해 둡니다. 모든 사람들이 평산을 외면하고 손가락질해도, 그녀만은 그의 편에 서서 사력을 다해 평산을 두둔하며 감싸 안습니다. 헛똑똑이 평산은 그런 그녀의 가치를 모릅니다.


함안댁은 첫아들을 가슴에 묻었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아이들은 거복이와 한복이. 거복이는 외모부터 성격까지 제 아버지를 쏙 빼 닮았습니다. 손버릇이 나쁘고 행실도 불량하여 온 마을의 지탄을 받는 악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런 거복이가 이번엔 봉순이를 돌로 쳐서, 그 아이가 피를 흘리며 죽은 거 같다고 합니다. 선이가 헐레벌떡 달려와 전한 그 소식에 “애비 아들이 모두 개백정이냐!”라며 소리치는 막딸네의 일갈을 들으며, 함안댁의 눈에서는 빛이 꺼지고 맙니다.


난리통을 수습하러 달려가는 두만네와 막딸네와는 다르게 함안댁은 손에 쥐고 있던 옷감의 바느질 속으로 빠져듭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평산에게 두드려 맞고, 발길질당하고, 난폭한 말로 난도질당할 때마다 울음을 참고 숨어 들어가던 공간, 자신의 베틀 앞처럼, 자신의 아이가 벌였다는 크나큰 잘못 앞에서, 그것과 차마 대면하지 못하고 일감 속으로 숨어드는 함안댁의 작은 눈은 빛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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