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속 인물들. 토지 7권.
“이놈아! 소 잡는 칼 가지고 날 찔러 죽일 테냐?”
“그렇다! 이 중놈아!”
방 밖에서 우레 같은 소리가 울려왔다. 다음 헝클어진 맨 상투의 육 척 거구, 화등잔 같은 눈이 시뻘겋게 물든 사내가 칼을 들고 나타났다.
- 12장 백정네 식구 中
혜관의 일갈은 관수를 향한 것이었다. 의병에 참여했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어 백정의 집에 숨어들었던 관수는 백정의 딸과 혼인한다. 동학에 몸 담았던 아비로부터 사람 안에 하늘이 있다는 생각을 이어받았을 관수에게는 아내의 사람됨이 중요했을 뿐, 신분은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도 아비가 되었고, 자신의 아이조차 백정네 손자로 불리며 천대받는 현실은 관수에게 예상치 못한 좌절감을 주었다. "코 하나에다 눈까리 두 개 아가리 하나… 다를 기 뭐 있노.” 무엇 하나 다를 것 없는 다 같은 사람이건만, 백정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천대받는 현실. 천진난만한 아이에게까지 씌워지는 지긋지긋한 신분의 굴레… 결코 깨어질 것 같지 않은 그 굴레의 존재를 확연하게 느끼게 된 관수는 어느새 “백정네”를 자꾸만 입에 달고 살게 된다. 마치 자학하듯이.
그런 관수의 자격지심은 혜관의 심기를 건드린다. 결국 참지 못한 혜관은 “벼룩 같은 놈! 노래미 창자야! 그 따위 베짱 가지고 평생 백정질이나 해 먹어라! 그렇기 비위를 못 색일 양이면 백정 딸을 왜 얻었어!”라고 일갈한다. 명석한 관수는 혜관의 노성을 듣고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린다. 혜관의 일갈은 마치 죽비처럼 관수를 깨웠지만, 관수의 장인에게는 큰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육 척 장신의, 나이가 많이 든 지금에도 힘이 장사인 사나이. 상민인 관수가 천민인 백정과 가족이 되어도 괜찮겠다 마음먹을 만큼, 백정 노릇과는 상관없이, 마음만은 당당하고 거칠 것 없었을 사람. 범의 기상을 가지고 있지만 온갖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며 돼지와 소를 잡는데 평생을 써야 했던 사내. 제 이름 석자는 온데간데없고, 어디를 가든 그저 “백정”이라고 불리웠던 남자. 남들보다 몇 배는 더 기운이 넘치는 그가 평생을 천대받으면서도 그 수모를 견디며 살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의 금지옥엽, 딸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세상에 태어나 보니 백정 일을 해야 하는 처지였고, 누군가를 만나 가족을 이뤘고, 사랑을 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딸을 얻었다. 식구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서,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잘 키워내기 위해서, 그는 식솔을 건사할 수 있는 일거리를 포기할 수 없었고, 천대받는 일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갖 멸시와 수모를 이 악물고 참아내며, 일평생동안 성실하게 가족의 울타리가 되어왔을 것이다.
“내 일 같으믄 골백분이라도 차, 참겄다!”
화등잔 같은 눈이 시뻘겋게 물든 늙은이가 울음을 삼키며 말한다. 멸시와 천대가 나에게 쏟아지는 것은 괜찮다. 나는 골백번이라도 참아낼 수 있다. 그러나 내 아이만은, 내 자식에게만은 그런 시선이 미쳐서는 안 된다. 내 자식만은 신분에 얽매여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이 갑갑하고 옥죄는 세상이 아니라, 제 맘껏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살아야 한다. 코 하나에다 눈 두 개, 입 하나. 다를 기 뭐가 있노. 다 같은 사람 아니가...!! 마치 그물에 걸린 범이 울부짖는 것처럼, 젊은 아비와 늙은 아비. 관수와 백정. 두 아버지가 삼키는 울음과 울분이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