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무량함

-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속 인물들. 토지 7권

by 청록펜

* 무량하다 :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서희는 무량한 집념을 가지고 있다. 최참판댁의 마지막 후손답게 지극히 영민하고 도도하고 아름다운 서희. 어린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눈앞에서 자행되는 일들을 막아내지 못한 채 그대로 당해야 했다. 재물의 움직임에 따라 사람들의 인심이 움직이는 걸 지켜봐야 했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조준구 내외가 무도하게 자신의 재물과 땅과 사람들을 꿀꺽 삼켜버리는 것을 주먹을 바르르 떨면서 지켜봐야 했다. 결국 도망치듯 하동을 떠나야 했던 그녀에겐 오로지 내 땅으로 돌아가겠다.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고 말겠다는 무시무시한 집념만이 남아있다. 원래 내 것이었던 것들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내 나라를 빼앗은 왜놈들이라 할지라도 손잡지 못할게 무어냐?! 이동진이 요청한 군자금은 거절하면서도, 일본 총영사가 비호하는 절에는 아낌없이 시주하는 그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마어마한 집념으로 때를 기다리며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녀다.


봉순이는 무량한 허무를 안고 있다. 유복자로 태어나 홀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자애롭고 따뜻하던 어머니가 역병에 걸려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길상을 사모했으나 길상의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향해 있었고,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다르게 살아보려고 기생이 되었다. 타고난 용모와 재주로 인해 기생으로서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지만, 재주를 팔고, 마음에도 없는 사내들에게 안겨야 하는 삶이란 그녀에게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무를 주었다. 땅에 발을 붙이고 있건만, 마음은 허공에 떠있는 봉순 아니 기화는 어디를 가도 외롭고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만 같다. 비단 금침보다 따스한 엄마 품이 그리운 여인. 그녀도 그녀만을 위해주는 유쾌하고 따뜻한 사람과 이어질 수 있기를. 그와 함께 한 마음으로 고운 노래를 부르는 날이 있기를 바래본다.


주갑이의 마음은 무량하다. 그야말로 무게를 잴 수 없다. 그의 말은 유쾌하고 가벼운 듯 보이지만 책임감이 있어 육중하고 누구보다도 진중하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잴 수가 없다. 엄청 가벼우면서도 엄청 무거우니까. 강의원의 말을 마음에 새겨듣고, 다음날 아침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짐을 챙겨 따라나선 그의 모습에서는 삶의 무게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이 보인다. 가벼운 발걸음과는 달리 마음은 묵직한 사람. 의리 있고 정이 있어 어디를 가든 좋은 동반자가 되는 사람. 그런 의미에서 주갑이의 마음은 무량하다.


강포수의 사랑은 무량하다. 귀녀를 만났을 때 그는 40이 되었다고 했었는데 어느새 세월이 흘러 이제는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되어있다. 옥중에서 태어난 아기를 안고 자취를 감추었던 그가, 두메를 데리고 용정에 나타난다. 고향 지리산을 떠나 줄곧 강원도에서 살아가다가 국경을 너머 온 까닭은 무엇일까. 이제는 곧 청년이 될 아이. 어미를 닮아 인물도 좋고, 검은 눈에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는 아이. 이 아이만큼은 어미가 지었던 죄에서 놓여나고, 어미와의 연결고리인 나에게서까지 벗어나야만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살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두메를 위해 고국까지 떠나왔는데, 최참판댁의 서희와 평사리 사람들이 이곳에 먼저 와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귀녀의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지극히 아꼈던 그 아들과의 헤어짐을,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을만큼 무량한 사랑으로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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