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가난한 사람들 - 권서방

-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속 인물들. 토지 8권

by 청록펜

3장 가난한 사람들은 동저고리 바람으로 달려오는 권서방으로부터 시작한다. 사실 거간꾼 권서방은 주의 깊게 살펴본 인물이 아니었다. 거간꾼으로서 나름의 원칙을 지닌 공노인과는 달리, 이익 앞에서 “겨레”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는, 그래서 김두수가 용정 바닥에 땅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준 인물이라는 정도로만 그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펼쳐 본 이야기에서는 권서방의 사정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공노인의 소개로 늦장가를 들었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젊은 아내는 그에게 아이들을 줄줄이 낳아준 모양이다. 마누라가 처음 아이를 낳아주었을 때 그는 참 행복했겠지만, 그 “해산”이 자꾸만 이어지니, 공노인의 아내 방씨가 농으로 한 “마누라 해산달”이라는 말만 듣고도 역정이 난다. 태어나는 아이가 반갑지 않을 리는 없을 텐데, 그 아이들로 인해 그가 져야 했던 책임이 무거웠던 것이리라. 아이가 태어나면 당장 ‘마누라’라는 노동력을 잃게 된다. 아기 엄마가 몸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니까. 아이가 만들어내는 대혼란 상황은 또 어떻고. 밤낮없이 울고 보채어 사람의 혼을 쏙 빼놓고, 매일 나오는 기저귀 빨래나, 아이만을 위해 준비해두어야 할 옷가지며, 아내를 돕는 손길들을 위한 음식들까지... 무엇이든 최소한으로 한다고 해도. 거간꾼 권서방에게는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아예 김평산처럼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부담조차 가지지 않았겠지만, “그런 악담 마시오, 해산달이라니, 날 죽어라 그 말입니까?”라고 정색을 하며 역정을 내는 권서방은 그래도 가장으로서 제 역할을 하려고 하는, 책임감 있는 사내인 것이다.


올망졸망한 식구들과 겨울을 나기 위해 “한 건”이 필요한 그의 앞에, 길서상회의 곳간 뒤에 있는 땅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어서 빨리 연결시켜서 수입을 잡아야 하는데, 길서상회와 다리를 놓아줄 공노인은 조선에 가고 없다고 한다. 권서방의 눈에 공노인은 이미 든든하게 자리를 잡은 사람이다. 집을 소유하고 있고, 일궈 둔 재산도 있으며, 게다가 책임져야 할 가솔이라곤 마누라 하나뿐. 그런 처지라면야 염치와 도리를 생각하며, ‘땅 사는 사람이 누구냐?‘를 따져가면서 흥정을 붙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 집 한 칸도 없이, 어린 자식새끼들 배불리 못 먹이고, 못 입히고, 당장 겨울을 날 돈도 없는 나는!!! “상대가 누구면 어때? 왜놈 아니라 왜놈의 할애비라도 좋다! 우리 식구 먹여만 준다면. 내가 잘 못해서 나라를 잃었나? 빌어먹을.“ 그는 울분에 차서 화를 내다가, 아무리 화를 내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체념하다가 결국 자신을 탓한다. '내 잘못이야. 늦장가는 왜 들어서....‘


그런 권서방을 신수가 훤해진 송애가 가로막는다. 송애와 공노인 부부의 옛 인연을 알고 있었던 그는 당연히 송애가 객줏집에 가는 길 일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송애는 공노인과 방씨를 “그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신세 진 것 없다고 뻔뻔스럽게 말하고, 권서방에게 집을 하나 장만하고 싶다고 청을 넣는다. 권서방은 배은망덕한 송애가 괘씸해서, 자신의 상황을 잊은 채 “너 따위에겐 집 팔지 않는다! “라고 큰 소리를 쳤다. 하지만, 박서방의 점포에 들렀다가, 온갖 풍상을 겪고 2년 만에 용정에 돌아온 홍서방을 만나고, 그들과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면서도 송애가 했던 ”아저씨한테 이득이 되는 일인데... “라는 말이 자꾸만 귓전을 맴돈다. 아무리 아껴봐도 늘상 배불리 먹지 못하는 아이들, 젊은 아내의 요청, 우리 가족들이 겨울을 날 수 있게 해 줄 한 건. 자꾸만 자꾸만 맴돌던 송애의 그 말이 마침내 권서방의 마음바닥에 단비처럼 스며든다. ‘상대가 누구면 어때? 왜놈 아니라 왜놈의 할애비라도 좋다... 우리 식구 먹여만 준다면.....’


사랑하는 가족들이 굶주리고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상황 앞에서 양심과 도리를 지키며 눈앞의 이득을 포기할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왜놈들이나 왜놈들에게 찰싹 달라붙는 이들이 득세하며 재물을 움켜쥐던 그 세상, 정작 이 상황을 만들어낸 사회 지도층들은 이미 가진 것이 많기에, 나라 잃은 상황에 대한 눈만 닫고 나면, 양심과 도리에 대한 첨예한 고민 없이도 잘만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재물이라는 울타리가 있으니까. 정작 나라 잃는데 아무런 역할을 한 적도 없는 민초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일들을 하면서, 왜놈과 왜놈 앞잡이들과 직접 부딪혀야 하고, 도리와 양심에 위배되는 상황에 수시로 처하면서 권서방과 같은 고민들을 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세월도 바쁘고 마음도 바쁜” 늙은 아비, 권서방의 모습은 그 시대를 어렵게 어렵게 살아냈던 수많은 가장들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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