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가장과 나라 - 임역관댁

-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속 인물들. 토지 8권.

by 청록펜

온 나라 방방곡곡으로 들풀처럼 번져갔던 만세운동은 일제에 의해 참혹하게 탄압을 당했고, 임역관 댁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임역관은 만세운동의 와중에 사살되었고, 그 아들인 명빈은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고 집안의 대들보인 장자마저도 끌려가버린 임역관댁. 임역관의 든든한 보호 아래에서 사느라 세상 물정을 몰랐던 아내와 며느리는 어느새 “아들 때문에 유식해진 어머니, 남편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된 아내”가 되어있다.


가족은 서로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된다. 사회에 나가 세상과 직접 부딪히며 가정을 지키는 가장은 존재 자체로 가족들의 울타리이다. 내 가족을 누구도 쉽게 대할 수 없도록 막아주는 울타리. 그런 가장이 사회 속에서 잘 버틸 수 있도록 지지해 주는 것은 가장을 향한 가족들의 보살핌과 사랑이다. 아내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며느리가 가정에서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임역관과 명빈은 자기의 일에 몰두할 수 없었을 것이고, 사회적인 성취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서로에게 알맞은 역할을 하며 다복한 가정을 꾸려가던 임역관댁이, 외부의 힘-나라의 주권을 빼앗은 일제-에 의해 부서지는 모습은 그 시대를 살아냈던 수많은 가정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다.(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도 역시 남자들일 것이다.) 조선시대 사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들도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고, 건사해야 할 처자식이 있었다. 그럼에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가장의 역할을 포기하고, “대한의 남아”로서 살아가는 길을 택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그리했을 것이다. 토지 속에 나오는 이동진도, 권필응도, 장인걸도... 나라를 위해 개인의 삶은 포기했다. 장인걸은 독립운동의 와중에 아내가 죽임을 당했고, 이동진은 그가 포기한 “개인의 삶“의 의무들을 아내 염씨가 이어받아 근근이 이어가며,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이상현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망국의 거미줄에 걸린 한 마리의 나비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포자기하며 스스로를 찔러댄다.


“내 나라”가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라 잃은 백성들의 삶이, 뿌리 뽑힌 채 부유하는 눈물 어린 이야기들을 <토지>를 통해 들여다보면서,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나라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지, 내 나라에서 평온하게 보내는 이 일상을 위해, 우리의 선조들은 무엇을 희생해야 했는지를 기억하고 배워간다.


나라는 가장과 같다. 세계의 열강들과 직접 부딪히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제 울타리 아래에 있는 백성들의 삶을 지킨다. 나라가 힘을 잃으면 일제강점기 때 그랬듯, 외세의 먹잇감이 되어 백성들의 삶은 갈가리 찢기고, 무너진다. (물론 그 와중에도 김두수처럼 제 살길을 찾아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고 돌아보면 좋겠다. 선조들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개인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우리가, 나라의 구성원으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서로를 아끼면서 살아가면 좋겠다. 나와 다르다고 혐오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어려운 사정에 처한 사람들을 돌아보고 보살피면서. “나만 잘 살면 돼!”가 아니라, 모두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마음을 모아 궁리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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