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태항아리

-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와 연결한 이야기. 토지 8권.

by 청록펜

태반이 없으면 아기는 엄마의 태중에서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 왕가에서는 왕의 자손이 태어나기 전에, 태반을 담을 항아리 두 개를 미리 준비해 둔다. 아기의 태반을 그냥 버리지 않고 그것을 작은 항아리에 넣고, 그 항아리를 조금 더 큰 항아리에 넣어서 이중으로 보관한다. 이것을 태항아리라고 한다.


왕자와 공주…. 태어나면서부터 귀하게 여김 받는 그야말로 선택받은 아이들. 태항아리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그 옛날 사람들이 왕의 자손이 태어나는 것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엄중하게 준비했던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생명을 이어가게 해 준 태반까지 귀하게 여겨, 그냥 버리지 않고, 고이 보관하는 마음. 지금처럼 쿠팡에서 뭐든 주문하면 그다음 날 배송받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으니, 태항아리도 역시, 장인에게 사전에 의뢰하여 공들여 만들게 한 후, 아기에게 필요한 다른 물품들과 함께 미리 준비해두었을 것이다.


아이를 대할 때도 그런 자세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뭐든 미리 생각하여 준비해 두고,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깨질세라… 귀한 손님을 대접하듯, 열과 성을 다하여 길러내었겠지. (왕자와 공주의 엄마들은 대부분 가사노동과 생존노동에서 자유로운 상태이고, 각종 도움의 손길까지 충만한 상황이니까. 더더욱 육아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다들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본인이 선택할 수도 없고, 어찌 노력을 해 볼 수도 없는, 그저 “주어지는” 부모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사람의 가치”마저 달라져 보이는 현실은, 내 어리석은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물론 왕자와 공주로 자랐다고 해서 모두가 끝까지 행복한 삶을 사는 건 아니고, 천민의 자손이라고 해서 웃을 일 한번 없이 모두가 끝까지 불행한 것도 아니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이 - 예를 들어 먹고 입고 사는 문제들이나, 글을 배운다거나, 책을 읽고 생각할 시간과 환경을 얻는다거나, 나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능력들이... - 누군가에게는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게 너무 쉽게 주어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온갖 노력을 다 해야 겨우 얻을까 말까 한 이런 세상은.... 어째서 이런 체계이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꿔 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마음이 답답하고 생각이 꽉 막히는 것 같다.


<토지>에서 본인의 태항아리를 가졌을 사람은 아마도 최치수, 최서희, 이상현 정도가 아니었을까? 환이도… 어쩌면 윤씨부인이 태항아리만은 준비해 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옥을 깎아 놓은 듯 어여뻤을 환이를 젖도 물려보지 못한 채, “낳았지만 낳은 적이 없는 아이”로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으니. 그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서희도 아마 귀하디 귀한 제 핏줄, 환국과 윤국을 낳을 때 엄중한 마음으로 태항아리를 준비했을지 모르겠다. 이번 주 분량의 뜨거운 감자였던 임이네는 어땠을까? 누구보다도 욕심도 많고 솜씨도 뛰어난 사람이니, 형편과 사정이 허락했다면, 홍이를 위한 예쁜 태항아리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이 할퀴고 간 상처가 너무나 컸고, 결국 믿을 것은 “돈”뿐이라는 생각에, 다시는 쥘 수 없을 만큼 큰돈 “팔백 원”을 눈앞에 두었을 때, 입만 열면 “천금 같다”던 홍이를 서슴없이 버리려고 한다.


아무래도 홍이의 “태항아리”는 월선이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존재 그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 아낌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그 태항아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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