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속 인물들
곱디곱던 아씨였으나, 험난한 세월을 보내고 이제는 반백이 된 윤씨부인.
재산을 축적하며 신망을 잃어버렸던 선대의 마님들과는 다르게, 윤씨부인은 재물을 지키면서도 마을 사람들의 인심을 잃지 않아서, 현재 평사리에서 인정받는 “최참판 댁”의 위상을 일구어 낸 능력자입니다.
서늘한 기상, 대쪽 같은 성품의 그녀에게도 비밀이 있었습니다.
백일기도를 드리러 절에 갔다가 겁탈을 당했고,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어 목을 매려 했으나 충성스레 곁을 지키는 김서방 내외(훗날 바우할범 & 간난할매)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문의원과 월선네의 도움으로 남들의 눈을 피해 아이를 낳았고, 젖을 한번 물려보지도 못한 채 그 아이, 환이를 보내야 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돌아온 집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산적한 일들과, 아무것도 모르는 시어머님,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삶이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동안, 자신의 아들, 치수에 대한 마음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치수를 위해 손을 뻗어보려니, 외면해 버린 환이가 웁니다. 존재 자체가 고통이었던 아이, 나를 통해 생명을 받아 세상에 나왔으나, 끝내 외면하고만 그 아이의 존재가 마음에 밟혀서, 곁에 있는 치수에게 손을 뻗쳐 줄 수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눈에 비수를 품고 스스로를 찌르며, 아슬아슬한 마음속 “저울추”가 움직이지 않도록... “어미로서의 손”을 스스로 결박한 채 긴 세월을 견뎌냅니다.
영민한 치수는 부족한 단서들 만으로도 윤씨부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사랑했던 어머니, 어느 순간 나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어머니, 빈틈이라고는 없는 얼음 같은 어머니. 어머니의 차가움은 스스로 모성의 손을 결박한 채 살아야 했던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의 결과이건만, 그가 그런 어머니의 마음까지야 어떻게 짐작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아마도, 어머니가 다른 사내와 외도했고, 아이까지 낳았으나, 그 사내를 따라가지 못해 자신을 냉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뒤틀려, 여자 전체에 대한 혐오감으로 똘똘 뭉치게 되어버린 게 아닐까요?
삶 자체가 고통이었던, 어서 이 모든 것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는 반백의 어머니, 그 애통한 사정과 마음을 짐작조차 하지 못해 끝끝내 반발하고 보복하려고 드는 아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앞으로 어떻게 엮어질까요?
엉켜 버린 실뭉치 같은 두 사람의 갈등과 오해는 풀릴 수 있을까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들은 되돌릴 수 없는데… 서로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었던 두 사람의 엇갈림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