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속 인물들. 토지 3권.
* 완충재 : 두 물체 사이에 끼어서 충격을 완화하는 재료
판술은 원래 윤씨부인의 친정 남원 윤씨 집안의 충직한 하인이었습니다. 천주교도들에 대한 모진 박해로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났을 때, 판술이 병석에 있던 윤씨부인의 아버지를 최참판댁까지 업고 와서, 윤씨부인으로 하여금 아버님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후 평사리에 자리잡은 그는 바우 할아범의 뒤를 이어 두 번째 “김서방”으로서, 최참판댁의 대소사를 챙기는 일을 하게 됩니다.
성실하고 어진 마음을 가진 그는, 경작인들의 형편과 사정을 윤씨부인에게 전달해주어 작인들에게는 “기댈 수 있는 입”이요. 윤씨부인에게는 “밝은 눈과 귀”가 되어주었던 사람입니다.
귀녀의 옥바라지를 위해 강포수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미처 받지 못한 수고비를 셈해 달라고 찾아갔었던 사람도 김서방입니다.
귀녀로 인해 아들을 여읜 윤씨부인에게 그 말을 직접 전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강포수의 요청이 이치에 맞는 부분이 있었기에 김서방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입술이 허옇게 질리면서까지- 그 말을 전했고, 윤씨부인 역시 그 사정을 인정하고 강포수의 수고비로 300냥을 내어줍니다.
완충재의 역할은 이와 같습니다. 내 품에서 최초의 충격을 한번 견뎌내고 완화하여, 반대편에 서 있는 이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항우장사처럼 힘이 세다는 경작인의 생생한 원망도, 해마다 달라지는 작황과 소출 때문에 벌어지는 능글능글한 마름들과의 알력 다툼들도 김서방은 현장에서 직접 겪어야 합니다. 본인이 삭힐 것은 삭히고, 윤씨부인이 꼭 알아야 할 것은 전달합니다. 그랬기에 최참판댁은 평사리 작인들에게 신망을 얻는 집안이 될 수 있었고, 윤씨부인은 김서방을 “서희를 위한 기둥”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완충재가 필요합니다. 여리디 여린 아이들은 부모가 완충재 역할을 합니다. 연세가 많은 부모님들은 장성한 자식들이 그 역할을 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가족들이 서로를 위한 완충재가 되어주는 가정에서 살고 있다면 참으로 놀랍도록 축복받은 삶입니다.
서희는 완충재를 잃었습니다. 친부모도 차례로 그녀의 곁을 떠났고, 믿음직한 김서방도, 어미의 빈자리를 살뜰히 채워주던 봉순네도,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던 할머니 윤씨부인마저도 갑작스러운 역병으로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녀의 곁에는 안하무인 조준구 내외가 도사리고 있고, 그녀를 보호해줄만한 어른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직은 어린 최참판댁 서희 아씨는 앞으로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