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융 내면세계의 자서전
제2권 제1장 붉은존재
칼융은 꿈에서 붉은존재 악마와 조우합니다. 악마와 종교에 대해 인간처럼 대화를 나누는 데요. 융은 인류는 모두 내면에 악마가 존재하며 이를 인정하고 마주할 때 진정한 영혼이 완결된다고 합니다.
"나는 나의 악마를 정직하게 맞이하며 진짜 인간을 다루듯 대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 '신비'에서 배웠다. 우리의 내면세계에 개별적인 인간처럼 거주하고 있는 미지의 모든 방랑자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가르침 말이다. 그 미지의 방랑자들은 우리에게 실제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94쪽)
"내가 악마와 타협하는 과정에, 악마는 나의 진지함의 일부를 받아들였고 나는 악마의 기쁨의 일부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만약에 악마가 더욱 정직하게 변했다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더욱 다잡아야 한다. 기쁨을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삶과 삶의 실망으로 이끌고, 바로 이 삶과 삶의 실망으로부터 우리 삶의 완전성이 시작된다."(96쪽)
제2권 제2장 숲 속의 성
자신 가장 내면의 숲 속의 성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을까요? 칼융은 꿈에서 노인과 그의 딸 여인을 만납니다. 이 여인은 살로메의 변형으로 칼 융 내면에서 갈구하는 여성성과도 연관되며, 쾌락의 상징이기도 하지요. 내면에서 갈구하는 것은 의식적인 세계에서 추구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며, 숨어있는 무의식이지만 결국은 의식을 지배하는 속성을 지니기도 한다고 합니다. 강한 남성성을 추구할수록 경멸하는 여성성을 내면에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대단한 남자다운 사람에게 자신의 여성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비통한 일이다. 그에겐 여성성이 우스꽝스럽고 무력하고 야비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러면 마치 당신이 모든 미덕을 다 잃어버린 것처럼, 타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남성성을 받아들이는 여자도 똑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 자신이 노예가 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104쪽)
"남자들 안의 여성성은 악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그런 사실을 욕망의 길에서 발견한다. 여자 안의 남성성도 마찬가지로 악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안에 있는 다른 반쪽을 받아들이길 싫어한다. 그러나 만약에 당신이 그걸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런 당신에게 인간의 완전성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저절로 나타나게 된다."(105쪽)
남녀를 초월한 자신의 경계를 허물어야만이 영혼의 갈등을 잠재울 수 있다고 합니다. 자기 한계에 갇혀있는 학자들의 조롱하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분명히, 그런 학자들은 외적 사물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외적 사상들을 위해서 산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의 대상을 위해 산다는 뜻이다."(106쪽)
"그런 학자들은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기라도 하면 마음을 다치고, 다른 사람이 똑같은 것을 조금 더 나은 방식으로 말해도 낙담하고, 누군가가 그들의 관점을 약간이라도 바꾸기만 해도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한다... 많은 장점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초라한 노인들은 영혼이 굶주린 탓에 인정에 목말라한다. 그런데 인정에 대한 그들의 갈증은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영혼은 당신의 지혜가 아니라 당신의 어리석음을 요구한다."(106쪽)
의식하지 못하는 다른 한쪽은 성적인 것일 수도 있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악마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융은 다른 한쪽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영혼은 구제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요.
"당신의 경멸이나 분노를 자극하는 모든 것을 차분히 들여다보라. 그런 노력을 기울일 경우에, 당신은 내가 창백한 처녀와 함께 경험했던 그 기적을 성취하게 된다. 당신은 영혼이 없는 것들에게 영혼을 불어넣고, 그러면 영혼 없는 것들은 끔찍한 무에서 무엇인가로 변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신은 당신의 다른 반쪽에게 생명을 찾아줄 것이다. 당신의 가치들은 당신의 현재 모습으로부터 아주 멀리, 당신 자신 그 너머까지 끌고 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당신의 존재가 납덩이처럼 당신을 바닥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당신은 동시에 두 쪽 모두를 살지 못한다. 두 쪽이 서로를 배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길에서 당신은 두 쪽을 다 살 수 있다. 따라서 그 길이 당신을 구제한다. 당신이 산 위에 있으면서 동시에 계곡에 있을 수는 없지만, 당신의 길은 산에서 계곡으로, 다시 계곡에서 산으로 이어진다. 많은 것이 즐겁게 시작하여 어둠 속으로 이어진다. 지옥에도 단계가 있다."(108쪽)
제2권 제3장 나의 비천한 반쪽
숲 속에서 무식한 농부를 만납니다. 농부는 그 날밤 오래된 지병으로 죽고 마는데요. 죽음에 대한 단상과 사회적으로 최고의 지위를 누렸던 융은 꿈에서 만났던 비천한 삶의 농부에 빗대어 최고의 삶은 오히려 고통을 줄 수 있다고 하네요.
"어떤 빈곤이 나에게 합류하며 나의 영혼 속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하고 있으며, 따라서 나는 아직 충분히 빈곤하지 않다. 내가 빈곤을 살지 않을 때, 나의 빈곤은 어디에 있었는가? 나는 삶의 고수였다. 삶에 대해 정직하게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삶을 산 사람이란 뜻이다. 빈곤은 멀리 벗어나 있었던 탓에 망각되었다. 그래서 삶이 힘들어지고 더욱 음울해졌다. 겨울이 계속 이어졌고, 빈곤은 눈밭에 서 있다가 얼어붙어 버렸다. 나는 스스로 빈곤과 결합한다. 내가 빈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빈곤은 삶을 가볍고 편하게 만든다. 빈곤은 깊은 곳으로, 말하자면 내가 높은 곳을 올려다볼 수 있는 바닥으로 나를 안내한다. 깊은 곳을 갖고 있지 않으면, 나에겐 높은 곳도 없다. 내가 높은 곳에 있을 수 있겠지만, 바로 그곳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높은 곳을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부활을 위한 바닥이 필요하다. 만약에 내가 언제나 높은 곳에만 있다면, 나는 높은 곳에 질릴 것이며 최고의 것이 나에게는 끔찍한 것이 될 것이다."
현실 세계의 지옥, 고통 외에 인간을 두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죽음에 직면이죠. 죽음에 대한 공포.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한정된 생이지만 생명력으로 살아가고 나아가는 것이지요. 맑은 생명력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요. 융은 바다의 물결과 파동으로 인간의 생을 비유합니다.
"이유는 단신이 바다의 생명력, 당신이 힘을 전혀 쓰지 못하는 가운데 당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던 바다의 물결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은 당신을 낯선 해안으로 몰고 갔다가 데려오고 또다시 당신을 밀어 올렸다가 속으로 삼키는 바다의 큰 파동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것이 곧 전체의 삶이고 각 개인의 죽음이라는 것을 보았다."(116쪽)
제2권 제4장 은자, 첫째 날
융은 꿈속에서 우연히 은신해 있는 은자를 만납니다. 복음서(성경)를 읽고 있는 은자에게 융은 성경을 통해 무엇을 얻는지 은자에게 묻습니다. 단순한 단어의 의미로 진리를 알고자 해서는 안되는다는 의뭉스러운 말을 남깁니다. 단어가 주는 상징, 이중성, 창조 등을 통해 진리를 얻을 수 있다고 은자는 말합니다.
"당신이 단어들을 믿는다면, 그 책은 당신 앞에 놓여 있으면서 언제나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에 당신이 오직 단어들이 상징하는 것들만을 믿는다면, 그런 당신에겐 결코 이해의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당신은 끝없는 어떤 길을 가야 한다. 이유는 삶이 유한한 길만 아니라 무한한 길을 따라서도 흐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없는 것은 당신을 불안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끝없는 것이 무섭고 또 당신의 인간성이 끝없는 것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한계와 제한을 추구한다. 그러면 적어도 당신이 길을 잃고 무한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당신에겐 억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당신은 한 가지 의미만을 갖는, 그 외의 다른 의미를 절대로 갖지 않는 단어를 강력히 요구한다. 그래야만 당신이 끝없는 모호성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이 당신의 신이 되어 버렸다. 말이 무수히 많은 해석의 가능성들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단어는 '무한성'이라는 악마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주는 마법이다."(126쪽)
제2권 제5장 은자, 둘째 날
은자의 이름은 암모니우스. 은자는 이상한 말을 합니다.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계기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융은 기독교라는 것도 이집트 교리 등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정신의 한 부분 아니냐고 반박을 합니다. 은자는 반박하지 않습니다. 종교라는 것도 모두 하나의 사상을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죠.
"종교들이 가장 깊은 핵심에서 서로 다르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야. 엄격히 말하면, 그 핵심은 언제나 똑같은 종교야. 뒤이어 나오는 모든 형태의 종교는 그 앞의 종교의 의미인 거야."(134쪽)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필요한 것을 찾으려 했던 은자는 악마의 먹잇감이 되어버립니다. 은자는 욕망에 잠식된 것이죠.
"은자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사막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발결하길 원하지 않았으며, 그보다는 성경의 복합적인 의미를 발견하길 원했다. 당신은 작은 것들과 큰 것들의 광대함을 당신의 내면으로 빨아들일 수 있으며, 그럴수록 당신은 더욱 비어갈 것이다. 광대한 충만과 광대한 공백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외부에서 발견하길 원했다. 그러나 당신은 다양한 의미를 밖의 사물이 아닌 당신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의미의 다양성이란 것이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의미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서로 연결되는 의미들은 사물들 안에 있지 않으며, 당신이 삶에 개입하는 한, 그 의미들은 언제나 변화에 노출되어 있는 당신 안에 있다. 사물들도 마찬가지로 변한다. 그러나 당신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변화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 자신이 변하면, 세상의 겉모습 자체가 변한다. 사물들의 다양한 의미는 곧 당신 자신의 다양한 의미이다. 다양한 의미를 사물들에서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 은자가 사막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아닌 사물을 알아내려 했던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그리하여 욕망을 벗지 못한 모든 은자들에게 일어난 일이 그에게도 똑같이 일어났다. 악마가 부드러운 혀와 명징한 추론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 악마는 순간마다 해야 할 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악마는 그를 유혹하여 욕망을 품도록 만들었다."(1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