췌장암, 그리고 갑상선암
2014년 1월, 아버지가 췌장암 판정을 받으셨다.
암 선고 후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지내셨으면 해서 급히 옮길 곳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모두 이래저래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어머니는 홀로 아버지를 돌보는 것을 버거워하셨다. 두 분만 계실 수도, 남동생들이 모실 수도 없는 상황. 결국 이사 전까지 우리 집에 모시기로 했다. 좁다면 좁고 넓다면 넓은 24평의 집에서 친정부모님, 우리 부부, 아들 둘 그렇게 여섯 명이 함께 지냈다.
둘째가 어린이집 다니기 전이라 집에서 하루 종일 케어하던 때였다. 투병이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 없어 어머니는 일을 하러 나가셨고, 아직 손이 많이 필요한 아이들과 극도로 예민한 아버지의 일상을 챙기는 것은 내 몫이 되었다. 치료를 시작하신 아버지는 입맛이 없어 도통 드시질 못 했다. 그나마 내가 차린 밥상은 웃으며 꾸역꾸역 드셨기에 가족들이 집을 비운 점심이면 아버지만을 위한 특별식을 준비했다. "아, 맛있다"며 아버지는 전복죽을, 해물탕을, 생선구이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드셨다. 맛있어서가 아니었을 게다. '딸'이 해준 음식이라 그랬을 것이다.
내 인생 가장 후회되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또한 가장 후회 없는 시간이었다.
2014년 4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나는 갑상선암을 판정받았다.
병원 가는 길
갑상선암 수술 후 6개월마다 신촌으로 정기검진을 하러 다녔다. 운전에 익숙지 않던 때라 빨강 광역버스를 이용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젊은이들에 휩쓸려 버스에 승차했다. 한때 출퇴근을 위해 매일 오가던 길이었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둔 후 나의 바운더리는 유모차로 이동 가능한 10분 내 어린이집, 놀이터, 마트, 소아과가 전부였다. 다시 일을 시작한 후에도 우선순위는 늘 집에서 얼마나 가까운가 였다. 그렇다 보니 정기검진 날은 묶인 줄을 끊고 세상 밖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기분이었다. 단 몇 시간이지만 오롯이 혼자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홀린 듯 어디론가 바삐 걷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형형색색 뽐내는 가게와 사인들을 구경했다.
'위이이잉'
버스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오늘 병원 가는 날이지? 지금 신촌으로 갈게."
친정엄마였다.
"괜찮아요, 이미 버스 타고 가고 있어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전철역 가고 있으니까 먼저 도착하면 진료받고 있어."
친정엄마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냥 혼자 다녀올게요."
슬슬 짜증이 일었다.
"얼른 갈게.
나중에 나 병원 갈 때 같이 가 줘."
"........"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고, 겨우 나만의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절망스러웠다. 분노가 일었다. 상대가 원치 않는 호의를 호의라 할 수 있는가? "검사 결과가 궁금해서 가만있을 수가 없네. 너도 걱정되고." 라 말해주셨다면 달랐을까? 나중을 위해 나한테 적금 드는 거구나. 내가 이만큼 해줬잖아, 너도 이만큼 해줘. 나한테 고마워해 줘, 얼른. 나는 이런 행동들이 너무도 불편하다.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일 줄 모르는 내가 문제인가? 그렇다, 나는 모난 돌이다.
고등학교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지나친 강압 때문에, 그녀는 지나친 방관 때문에 힘들어하며 컸다. 그녀의 반응은 "엄마 귀여우신데?"였다. 귀엽다고? 이렇게 해석이 가능하다고?
독백
생각해보면 엄마는 인정 욕구가 매우 큰 사람이다.
그런 그녀에게 첫째 동생은 "맞아요, 잘 하셨어요." 해 준다. 하지만 나는 "내 생각은 이렇다. 나도 좀 인정해달라."며 투정 부리고 밀쳐낸다. 그럴 때면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말이 있었다. "너랑 OO(막냇동생)는 니 아빠랑 똑같아. 말을 들어먹질 않아." 아빠와 나는 그렇게 싸잡아 한 편이 되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찌 보면 우리 엄마는 참 쉬운 사람이다.
네, 네. 잘하셨어요. 엄마 덕분이에요. 엄마 최고예요.
한 마디면 자식에게만큼은 만사 오케이 이신 분이다. 그 말이 듣고 싶어서, 그 말이 힘이 되어 아버지의 몫까지 삼십 년을 버티고 이겨내신 분이다. 하지만 나 역시 힘겹게 삼십 년을 버티며 살아냈다. 부모 자식 간에도 궁합이 있다던데 엄마와 나는 참 맞지 않는 궁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녀는 역경을 잘 이겨냈다. 그만큼 찐한 전우애가 싹 텄으면 좋았겠건만, 유머라고는 1도 없는 성격의 모녀에게 그 시절은 그저 비극이었다. 벌어진 그네들의 틈과 상처는 어떻게 메꾸어야 하는가.
나는 왜 이리 삐딱한가.
나는 왜 쉬운 그녀 하나 맞춰주질 못 하나...
이미지: Photo by Daniele D'Andreti on Unspl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