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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야 Apr 26. 2022

시집은 시가 사는 집

다 자라면 먹거나 베개를 만들자

나는 예전에 초등학교에서 글쓰기 워크숍을 가진 적이 있는데, 정작 말을 갖고 놀 줄 아는 것은 유치원생들과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었다. 한 아이는 이렇게 썼다. "경적은 빨간 소리가 난다!" 또 어떤 아이는 이렇게 썼다. "화내는 것은 악마를 건드리는 것과 같다, 화내는 건 정말 나쁘다. 그것은 간의 맛이 난다."
그 아이들이 3학년쯤 되면 이름을 왼쪽 상단에 써야 하는지 오른쪽 상단에 써야 하는지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p58

바바라 에버크롬비 <작가의 시작> 중


어느덧 6년째다. 매주 목요일 아이는 신이 나서 미술학원에 간다. 둘째가 올해 열두 살이니 아이 인생에서 반 평생을 함께 하고 있는 셈이다. 몇 달 다니다 그만둔 클라이밍, 도예, 수영 등 여타 학원에 비하면 이렇게 열심일 수가 없다. 아이는 미술학원에 가서 그림 혹은 만들기만 하고 오지 않는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글과 그림, 때론 조형물까지 동원해 구체화한다. 그렇게 그림 한 장 한 장, 글 단락 단락이 모여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된다.


비록 개인 소장용이지만 이미 네댓 권의 책을 만들어 본 아이에게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림이던, 글이던, 음악이던, 패션이던. 나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입시미술로 갈아탄 첫째도 얼마 전까지 같은 미술학원에 다녔었다. 첫째는 종종 묻는다. 두 학원을 함께 다니면 안 되냐고. (하나 보내기도 벅찬 미술학원을 두 개나 다니겠다고? 아니 된다, 얘야.) 




"어머님, OO(둘째)가 시를 썼는데 너무 재미있어요.

 다음 책은 시를 모아 만들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아이가 일곱 살 때였다. 미술학원 원장님이 둘째가 쓴 시를 보여주며 이번 책은 시집으로 하면 좋겠다 권하셨다. 시(詩)가 자라면 먹거나 베개를 만들자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뭘 어떻게 먹겠다는 거지? 베개는 또 뭐야? 그런데 가만.. 너무 참신하잖아! 완전 귀여운데??? 그때여서 가능한 말랑말랑 새콤달콤한 발상들. 너무 사랑스럽다.


엄마와 원장님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계속 이야기 책을 쓰겠다며 시 쓰기를 거부했다. 어르고 달래보았지만 시는  결국 두 편으로 끝이 났고, 다음 책에 부록처럼 끼워져 실렸. 나는 종종 그 책을 꺼내 맨 뒷장으로 책장을 넘긴다. 시집은 시(詩)가 사는 집... 바닥에 흙이 있어서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집... 가만히 읊조린다. 절로 엄마 미소가 지어진다. 뾰족뾰족 삐뚤삐뚤했던 마음이 금세 말랑말랑해진다.


'시(詩)로 베개를 만들자'던 일곱 살의 아이는 이렁저렁 열두 살이 되었다. 내 눈에는 여전히 다섯 살, 일곱 살 아기 같기만 한데 아들의 인중 옆에 거뭇거뭇 올라오는 수염이 보인다. 이런 시를 또 만날 수 있을까?


하루하루 아쉬운 시간이 잘도 흘러간다.


제목: 시집

시집은 시가 사는 집
바닥에 흙이 있어서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집
흙에 시를 심으면
시가 자라지
다 자라면
먹거나 베개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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