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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처의 나라에서

by GIMIN

서울 시립 미술관에 고흐 전시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생트 마리 드 라 메르의 바다 풍경』의 역동적인 색채를 바라보다가, 파도 쪽을 바라봤다. 파란 물감과 허연 물감 사이로 여러 색의 물감이 붓질 자국이 그대로 남을 정도로 진하게 그려진 모습을 보았다. 어찌나 두껍게 그렸던지 마치 물감이 굳은 자국 자체가 일종의 부조(浮彫)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고흐 그림의 강렬한 색채가 주는 일렁거림을 나는 잠시 멈춰 선 채로 바라봤다. 고흐의 그림이 주는 질감을 발견한 이후로 나는 스크린에 투영되거나 화집에 있는 고흐의 그림을 한동안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 앵그르의 그림을 예술의 전당에서 본 일이 있었다. 작은 크기의 그림이어서 허리를 숙이며 지켜봤다. 뭔가 그림이 이상했다. 그림 안에 있던 나뭇잎이 흔들렸다는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그림이 움직인다고 지각한 걸까. 미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어젯밤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아까 티켓을 받으러 올 때만 해도 티켓의 찢어진 부분을 유심히 보면서 그리 깔끔하게 잘리지 않은 사실을 안타까워했는데 말이다. 나뭇잎이 흔들리니 인물도 덩달아 흔들리는 듯하여 나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앵그르의 그림을 보기 전엔 믿을 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 조그만 그림 하나의 충격이 바로 그다음에 본 귀스타브 도레의『수수께끼』를 더 시시하게 만들었다. 전부터 벼르고 있던 작품을 이 충격 이후로 봤다니. 유감스럽지만, 이 유감이 결국 이 충격을 폄하하지는 못했다.


무더운 여름이 가시기 전, 한차례 소나기가 내릴 때가 있다.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 비구름은 보랏빛으로 하늘을 물들였고, 어두운 모니터에까지 드리운 빛은 나를 기어이 창에 있는 손잡이를 잡게 했다. 하늘은 보랏빛에서 점점 비구름을 거두어들이고,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 저편에 노을빛이 펼쳐졌다. 전에는 미처 보지 못한 장엄함의 질감을 나는 오래도록 지켜봤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 하늘빛을 밀레의 『봄』을 볼 때 떠올렸다. 소나기가 막 그칠 무렵에 살짝 비치는 햇빛이, 나무를 가까스로 물들일 무렵의 순간을 그 그림은 적확하게 포착한 듯싶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그림 앞에서 서성거렸다. 가까이 가보기도 하고, 멀리 보기도 했지만, 결국 거기에 조그맣게 사람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있다고는 하지만, 안다고 해서 감동이 더 하거나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그 그림의 정감 어린 빛을 보면서 깨달았다. 다른 계절임에도, 다른 세상에서 나고 자란 사람임에도, 질감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순식간에 나와 그림을 연결시켰다.


왜 그림을 원본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내 나름의 답도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일 수 있었다. 그림의 질감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감각이 뒤바뀌는 경험을 한 나는, (원래 그런 형식인 작품을 제외하고) 빔 프로젝터를 사용하여 스크린에 띄운 그림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질감으로 지은 마음의 성은 견고하기 이를 데 없다. 때로는 그걸 몰랐으면 좋았을 걸 후회하지만, 내가 본 그림의 질감이 주는 감동에 미안한 듯하여 가만히 눈을 감는다. 앵그르의 그림 안에 흔들리던 나뭇잎은 지금도 눈꺼풀 안쪽의 어둠 속에서도 흔들린다.(2024.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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