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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MIN Jul 22. 2024

"I have a Library!"

7월 22일

 종로 도서관, 정독 도서관 아니면 남산 도서관.     


 하나가 아니라 셋이다. 물론 나는 이들을 소유하지 않았다. 소유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세 도서관은 모두 서울특별시 교육청이 소유하고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일반인이 책을 빌릴 수 있는 도서관’ 중에서 저 셋을 따라올 도서관이 강북엔 없다. 동네 도서관에 없는 비싼 책도 저 세 도서관  하나엔 반드시 있었다. 강북 전체의 구립 도서관 또한 저  도서관 앞에선 명함도 못 내민다.『히치콕과의 대화』를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아리랑도서관만이 소개장을 겨우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비싸다는『제임스 조이스 전집』도 남산 도서관에 있었다. 1985년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지금도 번역 중인(!), 비그리스도교권에서 처음 시도되는 번역이기에 예외적으로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가 친서를 통해 직접 축복(!)을 내린, 토마스 아퀴나스의『신학 대전』우리말 번역본을 1권부터 가지고 있는 강북의 도서관은,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선 종로 도서관뿐이다. (지금은 빌릴 수 없어서 몹시 안타깝긴 하지만)     

포트를 쓰기 위해 자료를 모을 때면 나는 으레 저 세 도서관 중 두 개는 들렀다. 때로는 검색조차 하지 않고 저 도서관에 들렀다.      

 



  

  정독 도서관을 가는 길은 그 유명한 감고당길에 속해있었다. 내가 들락날락했을 때는 아직 열린송현녹지광장은 존재하지 않았고, 서울공예박물관 대신 풍문여고가 자리매김했다. 감고당길의 입구는 그 덕분에 좀 더 은밀한 아우라를 띠었다.      

 

  돌로 만든 화분과 가로수를 따라 걷다가 매번 옆 뜰에 알뜰시장이 열렸던 카페를 지나가면 덕성여고 정문과 덕성여중 정문이 마주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거기서 고개를 들고 울창한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는 맛이 쏠쏠했다. 오후가 되면 하교를 하던 여고생이나 여중생이 삼삼오오 모여서 구름다리 바로 근처에 있는 떡볶이 집으로 가기도 하고, 북촌 방향에 있는 카페에 들르기도 했다.      


  덕성여고와 덕성여중을 잇는 구름다리 밑을 지나갈 때면 벽화 하나를 마주한다. 나이 지긋한 부부가 키스하는 그림이었다.      

 

  구름다리 밑을 지나면 확실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건물은 낮아져서 하늘은 탁 트이고 한옥 지붕이 즐비한 거리는, 휘우듬한 지붕과 거무죽죽한 나무 기둥의 은은한 매력을 마음껏 뽐냈다. 곳곳에 있는 갤러리 또한 오는 손님들을 막지 않았다.

 

  정독 도서관은 감고당길의 유혹을 견딘 사람만이 만끽할 수 있는 ‘히든 스테이지 보상 아이템’다. 오르막길을 오르고 나면, 옛날엔 경기고였던 도서관의 모습이 눈에 띄고, 각종 조형물과 시원한 나무그늘이 오는 사람을 반긴다.


  도서관은 복잡한 계단과 수많은 건물이 나란히 모여 있었고, 나는 거기서 하루 종일 책을 살펴도 지치지 않았다. 『꿈꾸는 책들의 미로』라는 책 제목은 이 도서관에 가장 잘 어울리지 않나 싶다.         



  


  남산 도서관은 늘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야 했다. 스무 살 무렵에도 그랬다. 거기까지 가는 일 자체가 하나의 운동이었다. 호기롭게 시작한 왕복 도보는 며칠 동안의 감기로 되돌아왔다. 그래서인지 가끔 이 도서관엔 사이클링 복장을 한 아저씨들이 눈에 띄게 많다.      

 

  정약용 동상 쪽을 보면서 언덕길을 오르면 잘 만든 밀 크레이프 케이크 같은 도서관의 모습이 숲 사이에서 불쑥 나타난다.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나는 으스스한 건물 내부를 보고 몸이 움츠러드는 경험을 얻는다. 서가에 들어가고 나서야 조금 진정되긴 하지만, 높다란 천장과 정갈한 책장, 발바닥 밑에 깔린 카펫 덕분에 ‘괜스레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자’고 매번 다짐했다.      


  도서관을 나와 버스정류장 쪽으로 내려가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남산타워가 우뚝 솟아있고 앞을 보면 후암동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비록 건너편 울타리까지 가서 봐야지 탁 트인 경치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지만, 남산 도서관의 웅장한 크기와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된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긴장을 풀 때가 많다. 이따금 남산 도서관 길 건너편에 있는 용산 도서관에 들르는 일도 있었지만.      





  나한텐 종로 도서관 가는 길이 다른 두 도서관 가는 것보다 조금 더 힘겨운 것 같다. 영화 DVD를 다른 데 보다 많이 구비하고, 시중에 없는 책도 많이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임에도 딱 두 번 가봤기 때문이다. 서대문 역에서 출발하는 25인승의 종로 05번 버스를 타고 올라갈 때면 구불구불 이어지는 데다가 경사도가 높은 오르막길과 약간의 내리막길 그리고 커브 길의 연속이었다.


  두 차례 모두 종로 도서관에만 있는 자료를 찾기 위해 간 것이었고, 공교롭게도 자료를 사용하면서 작성해야 할 포트도 쓰는 데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과제였다. 도서관 가는 길에 본 서울 성곽의 이채로운 모습이 아니었던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은 부족하고, 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은데, 한참을 돌아가는 느낌이 들어서 갈 때마다 짜증이 일었다. 물론 종로 도서관에서 필요한 자료를 찾았을 때의 환희가 그 짜증을 상쇄시켰지만, 나는 포트의 자료로 사용한 책을 빌려간 지 고작 3일 만에 반납했다. 포트에 사용한 책을 잠시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버려 둔 채로 있다가 잊어먹어서 무거운 책을 가방 안에 넣고 도서관까지 헐레벌떡 가고 싶지 않았다.       





  도서관에 대한 추억이 책에 대한 추억과 별개의 것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때로는 도서관 가는 길이, 때로는 도서관의 모습이, 때로는 도서관에 대한 감정이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하나의 사과를 보더라도 표현주의자들이 그리는 사과와 인상주의자가 그리는 사과가 각기 다르듯,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게 될 때 사물은 평면의 세계에서 벗어나 몸을 얻는다. 수차례 도서관을 들락날락하던 나는 안목을 얻었고, 그 안목이 지금 나라는 사람의 깊이를(깊은지 얕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들었다.         


  하나의 도서관엔 내 애정이 깃들었고, 다른 하나의 도서관엔 내 경외감이 깃들었고, 나머지 하나의 도서관엔 내 애증이 깃들었다. 옛날엔 어느 게 어느 것인지 단언할 수 있었다. 이제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다 애틋하고 다 아름답다.


  사회생활이 바빠서 동네 도서관이 아닌 다른 도서관에 가는 일이 뜸해졌지만, 언젠가는 다시 한번, 꼭 책을 읽는 일이 아니어도, 저 세 도서관만큼은 다시 한번 다 둘러보고 싶다. 지금의 내가 꿀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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