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7. 0-0-83
이승환에 대해 간과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이승환은 지금까지도 현역인 유일한 80년대 제작자다. 그는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자신이 직접 제작한 앨범으로 자신의 앨범을 꾸린 거의 유일한 아티스트다. 이 점을 간과할 때, 그의 수많은 앨범은 많은 점을 설명할 수 없다. 뛰어난 퀄리티로 모든 시련을 견디는 그이의 음악은 독자적 생존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제련되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제작한 이런 ‘미친 앨범’에 돈을 대주는 제작자가 그 당시에 과연 누가 있었을까. (앨범 크레디트에 기록된) 데이비드 켐벨이라는 뛰어난 뮤지션을 비롯한 수많은 미국 세션과 그에 못지않게 대인원으로 투입된 한국의 세션은 이 앨범의 거대한 제작 환경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그가 제작을 겸하지 않았던들, 이 앨범의 훌륭한 결과물 또한 온전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으리라. 사전 심의에도 굴하지 않고, ‘좋은 사운드’라는 일념 하나로 일군 거대한 도전이 이 앨범을 반석 위에 세웠다.
앨범의 첫머리에 있는 「천일동안」은 아티스트 이승환이 만들고 싶었던 음악을 처음으로 확실하게 드러냈다. 공간감을 강조하며, 저음부와 낮은 소리마저도 잡는 세밀한 레코딩, 전작에 비해 한층 나긋나긋해진 이승환의 목소리는 밀도 높은 공간감과 어우러져 한층 세련된 공간에 진입한다. 자신이 만든 사운드를 차분히 들려주는 그이의 사운드는 긴 기다림의 서사와 한데 얽혀 새로운 체험으로 문득 솟구친다. 김동률이 작곡한 솟구치는 멜로디가 데이비드 켐벨의 풍성한 편곡을 만난 이 곡에서 이승환의 보컬은 그동안 말하지 못한 감정을 끝까지 표현한다.
「천일동안」만 그런 게 아니다. 이승환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여러 장르의 곡을 이 앨범에서 모두 끌어모아 시도했다. 「악녀탄생」이나 「부기우기」 같은 훵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시시함」의 두왑을 가미한 재즈, 「흑백영화처럼」에 등장하는 90년대 컨템포러리 R&B, 「멋있게 사는거야」와 「너의 나라」에 등장하는 록, 「내가 바라는 나」의 클래식 세션을 가미한 모던 포크, 「다만」의 발라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는 이승환의 보컬은 (기술의 한계나 예산 문제로 인해) 지금까지 그이가 들려준 적이 없었던 감정과 소리를 마음껏 들려줬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앨범은 이승환이 생각한 음악을 최상의 포트폴리오로 구현하여 쌓아 올린 앨범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석원, (여기서는 최진우라는 이름으로 참여했고 훗날 지누로 활동하는) 히치하이커, 유희열, 김동률과 같은 당대의 작곡가들과 협업한 대목이나, 미국과 한국의 최고 세션을 동시에 굴렸(?)는데도 안정적인 앨범 전체의 사운드도 인상적이지만, 이 앨범은 그가 직접 쓴 곡 또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앨범의 후반부를 채우는 자작곡 「멋있게 사는거야」와 「너의 나라」, (현악 파트의 풍부함에 억눌리지 않는 이승환의 선명한 멜로디 감각이 빛나는) 「지금쯤 너에게」는 이승환이 훌륭한 싱어송라이터라는 사실을 확실히 증명한다.
뮤지션이 직접 모은 좋은 곡을, 충분한 당위성의 하이엔드 사운드로 담은 이 앨범은 좋은 사운드가 상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는 ‘확신’을 국내의 제작자와 아티스트에게 제대로 어필했다. 우리의 ‘자신감’은 이 탄탄한 뿌리를 바탕으로 마음껏 자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