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7. 0-0-88
이 앨범의 소위 ‘백화점식 구성’을 지적하자니, 김건모의 뛰어난 목소리가 귀에 꽂히며 그 지적을 일도양단한다. 그만큼 이 앨범의 음악에서 김건모의 목소리가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하다. 하긴 그는 「아름다운 이별」의 서정적인 발라드와 BPM이 빠른 댄스 트랙인 「잘못된 만남」을 둘 다 잘 부르는,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목소리만으로 일가를 이루는 몇 안 되는 보컬리스트니까. 그가 작곡한 「드라마」나 「넌 친구? 난 연인!」 또한 그의 목소리로 인해 작곡이 두드러진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특히나 「넌 친구? 난 연인!」은 그의 짝짝 달라붙는 보컬 덕분에 그만의 독특한 향취가 확실하게 아로새겨졌다. 「겨울이 오면」을 거의 아카펠라로만 채우거나, 「너를 만난후로」를 뉴 잭 스윙 비트의 곡으로 만든 김건모의 편곡(CD에는 이 노래의 기악 버전이 보너스 트랙으로 들어 있다.) 또한 이 앨범에 참여한 라인 기획 사람들에 뒤지지 않는 센스를 발휘한다.
김형석이 작, 편곡을 담당한 「아름다운 이별」은 이 곡에서 가장 이채로운 곡이지만, 김건모의 전성기 목소리가 지닌 섬세한 결을 잘 드러내는 트랙이기도 하다. 감정 자체는 번민으로 흔들려도 음정이 흔들리지 않는 그의 목소리는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역설 그 자체의 상황을 적확하게 표현하며, 3집 특유의 인공미를 상쇄하는 숨구멍으로 제대로 활약한다.
프로듀싱을 맡은 김창환이나 이 앨범에서 대부분의 곡을 쓴 천성일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이 앨범에서 6곡을 편곡한 김우진의 편곡 솜씨 또한 그냥 넘길 수 없다. 「잘못된 만남」에서 김건모가 노래 부르는 대목에서 신디사이저 루프를 줄이고 다소 딱딱한 드럼 파트를 채우는 방식이나, 「넌 친구? 난 연인!」에서 비트와 약간의 소스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김건모의 목소리와 김건모, 김창환, 천성일의 코러스로만 채운 방식을 들을 때마다 그의 영리한 편곡 센스를 새삼 실감하곤 한다. 그는 자신이 편곡을 맡은 곡 하나하나에 다양한 접근 방식을 취하면서도 ‘김건모 목소리의 박람회’라는 이 앨범의 목적에 걸맞는 편곡을 선보였다.
(지금은 의미가 많이 변질된) 나이트클럽에서 틀기 좋은 음악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시절, 이 앨범은 클럽 DJ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당대의 댄스 뮤직과 같은 방식으로 소구 되기 위해 제작되었다. 몇몇 곡을 제외한 이 곡 대부분의 빠른 BPM이 그걸 증명한다. 그러나 이 앨범은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나온 앨범 중에서도 참 독특한 미감을 지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잘못된 만남」이 곡의 빠른 BPM으로 인해 당대의 나이트클럽에 자주 울려 퍼진 곡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다소 느린 곡에 빠른 BPM의 비트를 첨가하거나 보강하면서 리믹스를 만들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곡이 클럽의 지하에서 올라와 대중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지나치게 우울한 내용을 지나치게 신나는 댄스 장르로 다루는, 일종의 강렬한 콘트라스트가 대중에게 제대로 어필했던 게 아닐까.
이 앨범의 시대에 이르러, 한국 대중음악은 정적이던 80년대 오버그라운드 음악과 본격적으로 결별하며, 90년대 초반의 활달한 에너지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문을 열어젖힌 건 서태지였지만, 이를 되돌릴 수 없는 영역으로 만든 물결의 선두에 김건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 앨범은 앨범의 무시무시한 상업적 성과와 더불어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