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7. 0-0-92
「기억의 습작」의 가사는 난해하다. 눌변으로 가득한 이 가사는 김동률의 목소리를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청춘의 옷을 입는다. 약간 플랫한 음정으로 ‘이젠’을 노래 부르는 김동률의 ‘실수’조차 가사의 눌변과 더불어 독특한 떨림을 지닌 ‘습작’의 일부분처럼 느껴질 정도다. (물론 그 중심에 김동률이 지닌 목소리가 지닌 설득력에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겠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가장 유려한 처음을 알리는 바리톤 목소리가 훌쩍 다른 높이로 뻗을 때, 곡은 마치 흐릿한 눈동자에 어느 순간 희미한 빛을 발견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종류의 경이로움을 청자의 가슴속에 선사한다. 원래는 좀 더 길었던 간주의 트럼펫 소리는 이러한 경이에 더욱 멋들어진 감정을 입힌다. 미련과 아쉬움이 끝내 거대한 향취로 발돋움하는 곡은 그렇게 청자의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굳건하게 남겼다. 클래식의 화성을 기반한 편곡과 어우러진 어수룩함인지라 곡은 더욱 빛을 발하는 듯하다.
서동욱은 「향수」와 「그대가 너무 많은...」의 보컬에 참여하거나 작사를 맡는 식의 방법으로 이 앨범 여러 곳에 존재감을 드러내며 김동률의 곡이 지닌 익숙한 어프로치를 온전히 그들의 ‘이야기’로 만드는 데 노력한다. 그래서 이들 또한 ‘어두운 방’과 ‘고립’을 노래하지만, 그 부분을 재즈 코드나 클래식의 화성으로 충분히 풀어낸다. 재즈의 작법이 깊숙이 들어간 곡인 「여행」과 「삶」과 같은 곡에서도 이들의 이야기는 건재하다. 전자가 낭만적 여행의 풋풋함을 김헌국(트럼펫)과 김구이(트롬본)의 능숙한 혼 섹션 연주로 감싼다면, 후자는 음악에 대한 다짐에 어둠을 입힌 멜로디를 (이정식의 능숙한 색소폰 연주가 가미된) 화성으로 탄탄하게 세운 편곡에 올린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인상적인) 「소년의 나무」의 ‘추억’조차도 김동률은 왈츠 박자를 도입하며 곡에 이채로움을 더했다. 바로 이 점이 전람회의 음악을 다른 뮤지션들의 음악과 구분 짓는다. 그들의 절실함은 엉성한 직관으로 쌓은 토대보다 음악적으로 탄탄하다.
(본인은 그저 완성된 음악에 ‘조언’을 했을 뿐이라 회고했지만,) 신해철은 이 앨범에서 디렉터 이상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생각한다. 그와 (1기 N.EX.T 기타리스트인) 정기송이 이 앨범의 후반부 트랙에서 맹활약하기 때문이다. 「기억의 습작」에서 비롯된 애틋함을 호소로 번역한 「그대가 너무 많은...」은 정기송의 기타 솔로가 인상적인 곡이며 「소년의 나무」를 감싸는 신해철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음악은 해당 곡에 군더더기 없는 감정을 한껏 살린다. 무엇이 곡을 위해 중요한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이토록 적확하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끔 뮤지션의 진심 비슷한 걸 엿들을 때가 있다. 감정 섞인 비문법적 표현과 포즈, 이해할 수 없는 음악적 구조, 2차 담론으로 완전히 말할 수 없는 디테일, 미숙하게 기법의 구사에서 오는 신선함. 음악의 세계란 참 희한해서, 정말 아주 가끔 아마추어가 프로를 이길 때가 있다. 능숙한 노련미에서 오는 소름에서 오는 경외의 감동과 풋풋한 마음에 전율하는 감동이 결국 같은 심장에서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잊고 산다. 전람회의 첫 앨범엔 놀랍게도 그 두 개의 감동이 한꺼번에 들어있다. (물론 이 둘을 따로 느끼지 않아도 되긴 하지만.) 나는 김동률이 자신의 음악을 매번 힘겹게 일군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나 가끔 「기억의 습작」의 첫 음을 들을 때마다 내 ‘믿음’은 상당히 흔들린다. 나는 그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앨범이 지닌 추억의 힘은, 상당 부분 (순진했기에 더더욱 굳건했던) 이 앨범의 음악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