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한 코스는 두 개였다. 우시고메카구라자카[牛込神楽坂] 역에 내려서 이다바시[飯田橋] 역까지 가는 내리막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카구라자카[神楽坂] 역에서 내려서 약간의 오르막길을 올랐다가 이다바시[飯田橋] 역으로 내려갈 것인지.
전자는 카페가 많은 카구라자카[神楽坂]의 절반을 깔끔하게 포기하는 대신,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코스였고, 후자는 언덕길이긴 하지만 카구라자카[神楽坂] 전체를 단번에 훑어보면서 갈 수 있는 코스였다. 나는 전자를 골랐다.
사실 그리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아침 겸 점심으로 먹기 위해 택했던 토리차야[鳥茶屋]의 우동스키(うどんすき)는 내 취향이 아니었고, 이다바시 역 근처에 있는 키노젠[紀の善]은 녹차 바바로아[bavarois : 프랑스의 푸딩 디저트]가 전문이었다. 엄마가 원한 일본식 팥죽은 맛이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나마 우동스키(うどんすき)에 어울리는 조합이라는 게 안심이었달까. 토리차야[鳥茶屋]라는 가게 이름 또한 재미있었고.
토리차야[鳥茶屋] 본점 길 맞은편에 신사가 있었다. 신사나 절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우리는 그게 젠고쿠지[善國寺]란 걸 나중에 알았다. 신사에 칠한 붉은빛이 가게의 붉은빛과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본점 가게 문을 열었다. 마침 대기 인원도 없었다.
직원은 우리를 세 개의 테이블이 있는 룸으로 데리고 갔다. 누런 조명이 흐린 날에 걷던 우리를 잠시나마 따듯하게 했다.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서 내가 우동스키(うどんすき)를 주문하는 동안 옆에서 손님이 들어왔다. 중절모를 쓴 흰머리의 남자가 흰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여성과 마주 보며 웃었다. 반대쪽 테이블에 있던 커플 둘은 닭고기덮밥 정식 두 개를 시켰다.
우동스키(うどんすき)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결국 사진으로 남지 않았다. 엄마는 지금도 그걸 두고두고 아쉬워한다.
앞머리가가지런한 단발머리 여자가 쟁반을 들고 커플이 있는 테이블에 살금살금 다가갔다. 닭고기덮밥 옆에 가지런히 모아둔 젓가락 끝이 남자 쪽으로 향했다. 여자는 머쓱해하면서 여러 번 사과했다. 감색 천에 하얀 실로 가늘게 수놓은 기모노 옷자락이 머리 아래에서 흔들렸다. 옆에 초록색의 기모노를 입고 온 여직원이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자는 수습인 듯싶었다.
룸의 문 밖에서 초록 기모노를 입은 여직원이 수습에게 된장국이 받는 사람 왼쪽으로 가게끔 하라는 말을 시작으로 여러 조언을 조곤조곤 말해주었다.단발머리 여자의 앞머리끝이 가만히 흔들렸다.
곁들여서 나온 구운 떡을 언제 넣어야 할지 몰라서 종업원을 부르고 싶었다. 맛있게 먹고 있는 와중이어서 그런지 순간 말이 안 나왔다.나이 지긋하신 부인이 내게 도움을 줬다. 나오는 길에 나는 중절모를 벗은 남자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했다. 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토리차야[鳥茶屋] 본점 뒤에 있는 골목을 거닐었다. 배는 불렀기에 춥지 않았다. 그 근처에 있는 거리는 제법 운치가 있었다. 흐린 날이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나무 울타리를 비롯한 골목의 색이 은은하게 살았던 듯싶었다.
나는 내리막길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오르막길도 있었다. 만족스러운 식사가 불만을 잘 다스렸다.
이다바시[飯田橋] 역으로 가는 출구 바로 앞에서나는 회색 대리석에 스테인리스로 마감한 건물을 봤다. 모형음식을 놓는 자리까지도 검은 대리석으로 마감한 건물을 나는 잠시 넋 나간 사람처럼 쳐다봤다. 키노젠[紀の善]이었다.
종업원은 우리를 2층으로 안내했다. 놀랍게도 아까 도움을 받았던 노부부가 이미 계산을 마친 상태였다. 영영 헤어질 줄 알고 나눴던 인사를 서로 웃으면서 다시 주고받았다. 아마 그쪽이 더 당황했으리라.
그래서인지 몰라도 주문을 잘못했다. 팥죽을 시킨 대신 밤죽을 시킨 나는 다시금 팥죽을 시켰고 죄책감을 가진 나는 팥죽이 나올 때까지 먼저 나온 녹차 바바로아에 손대지 않았다.
생크림, 푹 고은 팥, 그리고 녹차로 만든 푸딩이 가지런히 놓인 디저트를 티스푼으로 한 입 먹으면서 나는 말차(抹茶)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단맛을 입고 사라진 쓴 맛이 도리어 아쉬워졌다.
엄마가 남긴 팥죽을 한 수저 먹으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팥죽과 더불어 나온 시오콘부[塩昆布 : 소금 다시마 절임]를 집어 먹었다. 짭짤했다. 짠 기가 가셔지기 전에 얼른 팥죽을 다시 한 입 먹었다. 짠맛을 감싸는 단맛이 입 안 가득히 깊숙하게 퍼졌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 길에 세상이 갑자기 차분해진 것 같았다. 여행의 피곤도 저 멀리 시간의 흐름 속에 떠내려 간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카구라자카는 마치 물속에 담근 수박처럼 서서히 그리고 묵직하게 기억 위로 솟아올랐다.
키노젠 [紀の善]은 주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문을 닫았고, 토리차야[鳥茶屋] 본점은 코로나가 만연했던 어느 시기에 문을 닫았다. (다행스럽게도 분점이 남아있다.) 내가 거기서 먹었던 녹차 바바로아는 영영 추억 속에서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게 마지막인 걸 알았다면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즐겼을까.
뚜껑 덮인 채 열리지 않는 우물을 보듯이, 그때의 카구라자카[神楽坂]를 바라보곤 한다. 흐린 날의 기억이 녹차향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