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이때, 이즈음에....』

PART 2. X-86-0

by GIMIN

우울로 얼룩져도 끝내 그윽함을 잃지 않는 이승열의 블루지한 보컬 덕분에 복잡다단한 편곡을 지닌 「5AM」은 들을 때마다 웅숭깊다. 은은한 리듬 기타 연주와 블루스를 머금은 솔로 기타 연주 사이로 이한진의 트롬본 연주와 최훈의 베이스 연주와 전명현의 키보드 연주가 아련하게 얽힌다. 중반에 이르러 이상민이 (주법을 바꾸며) 드럼을 약간 더 세게 연주한다. 그때, 카입(Kayip : 본명은 이우준이다.)이 연주하는 스트링 신디사이저 연주가 이승열의 목소리(와 기타 연주)를 가만히 떠받친다. 전반부에 약음기를 단 채로 트롬본을 연주한 이한진은 후반부에서 이 약음기를 제거한 채로 트롬본을 연주한다.


이승열은 어떤 특정 장르나 레퍼런스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Secret」와 「이날, 이때, 이즈음에...」 같은 완전한 록 넘버도 있지만,) 이 앨범이 주로 드러나는 블루스와 모던록은 그저 그가 여태까지 해왔던 (자신의 고유한 정서에 맞는) 장르였다. 때문에 그가 부른 ‘발라드’ 또한 엄밀히 말해 발라드라 부를 수 없다. (대놓고 이름에 ‘발라드’를 붙인) 「My 발라드」는 이상민의 감각적인 하이햇 연주와 이승열의 기타 솔로 연주가 매력적인 트랙이다. 길은경의 피아노 연주와 이승열의 목소리만 있는 「기다림」 또한 이승열의 목소리로 인해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가 매력적인데도) 한껏 처량하다. 사랑보다 끝없는 불안에 더 초점을 맞춘 이 곡은 ‘발라드’의 감미로움보다, 블루스의 체념이 약간 더 깃들었기에 더욱 간절하게 들린다. (그가 유앤미블루로 활동하는 시절에 처음 발표한) 「흘러가는 시간, 잊혀지는 기억들」은 불안과 회한이 더욱 은밀하게 숨어있다. 이 앨범은 뜨거운 불이 아닌 차가운 불로 탄다.


이 앨범에서 유일하게 그가 쓴 곡이 아닌 「비상」은 무겁기 그지없는 그의 블루지한 음악에서 유일하게 팝을 표방한 곡이었다. 애니메이션을 위해 따로 만든 곡임에도 비상의 전반부 벌스는 이 앨범(과 이승열의 보컬)과 결을 같이했다. 그러나 이내 ‘비상’하는 훅에서 이승열은 감정을 한껏 담은 목소리를 감동적으로 토로하며 해당 곡을 아름답게 띄웠다.


이 앨범 전체의 베이스 연주를 담당한 (이승열과 더불어 「분(憤)」을 같이 작곡한) 최훈은 이 앨범에서 이승열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자신의 베이스 연주로 드러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의 아련하고 신디사이저 베이스 솔로 연주, 「Mo Better Blues」의 길은경의 신디사이저 연주와 더불어 중저음을 책임지는 베이스 연주는 그의 연주 경력에서도 베스트에 속하는 연주였다. 「Secret」와 「이날, 이때, 이즈음에...」 같은 록 앨범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베이스 연주는 중저음이 핵심인 이 앨범의 사운드를 튼튼히 지탱했다.


이 앨범의 ‘묵직한’ 성과 덕분에 이승열은 다부진 솔로 아티스트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승열은 (적어도) 앨범 단위로는 이와 같은 어프로치에 다시 접근하지 않았다. 2집의 ‘낭만주의’와 3집의 ‘현실주의’를 벗어난 그는 4집인 『V』(2013)에 이르러 또 다른 길에 접어들었다. 그 옛날 ‘이방인’이란 딱지를 강제로 부여받은 그는 이제 스스로 ‘이방인’을 자처하며 다른 길로 나아갔다. 매번 성공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실패는 없었던 그의 지금 행보는, 이 앨범의 ‘작은’ 성공에서 시작했다. 그리 생각하니 새삼 이 앨범이 뿌듯하다.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그처럼 음악을 만드는 이가 그 말고 또 누가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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