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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구도

by GIMIN

시인과 술을 마셨다. 모조 전지를 깐 책상 위에 종이 접시를 놨다. 접시에 두부와 과자와 보쌈을 깔았다. 조교 냉장고에 미리 넣었던 맥주 페트병 여섯 개는 시인이 앉는 자리 뒤에 뒀다. 소주는 아는 형의 집에서 가져오기로 했다. 동아리 활동으로 먹다 남긴 소주라고 들었다. 형은 소주 박스를 자기 곁에 뒀다.


강의를 끝내고 자리에 앉은 시인은 말이 없었다. 뒷머리를 긁적이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기도 했다. 내 옆에 있던 선배가 시인에게 술을 권했다. 시인은 맥주잔을 받쳤다. 맥주가 형광들 불빛에 번들거리던 순간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거품마저도 취할 거 같아서 괜스레 잔을 뒤집었다. 과제를 미처 작성하지 못했다.


시인은 술을 마시며 다른 사람과 대화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은 어떻냐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시인은 아르바이트에 대해 물어봤고, 맞은편에 있던 여자 선배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한다는 사실을 넌지시 시인에게 말했다. 플라스틱 재질의 안경테를 낀 시인의 안경이 살짝 위로 들렸다. 형광들 불빛이 곤충의 날개가 퍼덕거리는 속도로 불빛을 깜박거렸다.


대학교가 고등학교랑 같이 있는 데다 보니 11시가 지나면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자리를 정리하는 길에 시인은 같이 젖은 종이컵을 치웠다. 둥근 모양의 젖은 흔적이 모조 전지 여기저기에 나있었다. 맥주가 들어있던 페트병 밟는 소리가 어두운 복도 안까지 울려 퍼졌다. 소주 두 병을 든 형은 나일론 카펫이 깔린 복도를 비틀거리며 걸었다.


백팩을 멘 시인이 교문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나와 시인 둘만 남았다. 정류장까지 가는 길에 시인에게 내가 인사했다. 버스를 타고 가라는 제안을 시인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시인은 가볍게 목례하며 달동네 쪽으로 걸어갔다. (지금은 재개발로 인해 없어진 달동네였다.) 가파른 언덕길이라 그런지 시인의 걸음은 약간 느려졌다. 주홍빛 가로등 불빛이 어두운 달동네 한가운데를 마치 점선처럼 가로질렀다.


나는 정류장에 앉아 언덕길을 쳐다봤다.


어두운 밤, 시인이 불빛만 가득한 골목길을 걸어 올라갔다.(2024.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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