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9. 67-91-80
기타 2대와 목소리(와 하모니카)로 앨범 사운드를 꾸린 첫 앨범과, 클래식 기타 한 대와 목소리로 앨범 사운드를 꾸린 이 앨범은 단출한 사운드라는 공통점으로 묶이는 듯하다. 그러나 「그해 겨울」의 기타 아르페지오 연주와 더불어 양희은의 선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그 공통점은 그저 편성 상의 공통점으로만 남는다. 격정적인 첫 훅이 끝나면서 잠시 기타 연주가 멈춘다. 앨범은 그렇게 양희은의 ‘격정’을 흠향할 공간을 청자에게 가만히 건넨다.
이 앨범은 양희은의 목소리에 깃든 섬세한 셈여림 표현을 고스란히 들을 수 있다. 페르난드 소르(Fernando Sor)의 에튀드(Etude, 연습곡) 중 한 곡에, 양희은이 직접 가사를 써서 붙인 「나무와 아이」에서, 그이는 아이가 등장하는 대목과 바람이 등장하는 대목을 (나무가 등장하는 대목과 달리 하여) 상대적으로 여리게 불렀다. 영원을 상징하는 나무와 변화를 상징하는 (외로운) 소년의 대비를 셈여림의 강약으로 표현한 양희은의 세심한 보컬은 소년의 생각과 나무의 생각이 서로 교차하는 모습을 대구(對句)로 표현한 대목마저도 감동적으로 표현했다.
「가을 아침」에서도 양희은의 목소리는 셈여림과 강조만으로 또 하나의 풍경을 자아냈다. 그이는 의성어(‘딸각딸각’)와 의태어(‘엉금엉금’)를 유달리 부드럽게 부르며 곡에 재치를 더했다. 그이는 또한 ‘커다란 숨’을 부르는 대목에서 ‘커’를 일부러 늘려 부르며 큰 숨의 뉘앙스를 청각적으로 표현했다. ‘시끄러운’을 일부러 세게 노래하며 시끄러운 조카들의 울음소리를 표현한 그이의 보컬 표현력은 단순한 곡 구조의 이 곡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이의 목소리로만 곡 초반의 벌스(Verse)를 채운 이 곡은 아르페지오 주법의 기타 연주로 일관된 이 앨범에서 유일하게 스트로크 연주를 훅에 보태며, 양희은의 목소리에 세심한 힘을 차분히 실었다.) 「저 바람은 어디서?」를 너누룩하게 노래하는 그이의 목소리는 곡에 깃든 인간의 근원적인 물음에 햇살을 한 줌 더했고, 「그리운 친구에게」의 수많은 언어를 엽서 쓰듯 정연(整然)하게 부른 그이의 목소리는 곡에 깃든 안부와 걱정에 맑은 가을바람을 더했다.
「사랑 - 그 쓸쓸함에 대하여」 또한 양희은의 이런 목소리가 없었던들 제대로 된 격조가 드러나지 못했으리라. 격정을 담아 노래한 모든 문장의 끝을 슬며시 놓는 그이의 보컬 표현은 사랑의 아름다운 결이 쓸쓸함으로 시나브로 사그라지는 과정을 청각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했다. 훅을 두 번이나 강조하는 (이 앨범에서는 꽤 특이한 구조의) 곡이 만남보다 사그라지는 이별에 중점을 두는 양희은의 이런 표현으로 인해 더욱 쓰라리게 들린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여성 프로듀서인 제럴 벤자민(Jeral Benzamin)의 프로듀싱과 그래미 어워드(Grammy award) 수상작을 여럿 녹음한 마이클 맥도날드[Michael MacDonald : 그는 지금도 A.T. Michael MacDonald의 명의로 활동 중이다.]의 레코딩 엔지니어링과 에디팅을 거치며 섬세한 사운드를 입은 이 앨범은, 『어린 왕자』(1943)의 한 대목을 낭송하는 「잠들기 바로 전」으로 끝난다. (양희은의 목소리는 이 곡의 ‘낭송’도 쉽게 소화했다.) 사랑과 인생을 노래한 그이의 이 그림 없는 ‘이야기’는 우리의 눈시울에 맺힌 맑은 눈물 한 방울을 손가락으로 닦으며, 다만 ‘좋은 꿈을 꾸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모진 목숨을 간신히 건사한 저녁에서 맑은 잠이 두 눈썹 위에 어린 새벽으로 우리가 천천히 넘어가기를 이 앨범은 지금도 계속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