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Blues』

PART 9. 23-42-72

by GIMIN

콘크리트의 회색빛만 거리를 꾸역꾸역 메웠던 시절. 가로등의 주황빛이 거리를 따사롭게 물들일 때면, 이들은 (엄인호가 경영한) 신촌의 한 카페에 옹기종기 모여 음악적인 ‘교류’를 이어나갔다. 거기엔 유명한 사람도 있었고, 잊힌 사람도 있었고, 무명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선 모두가 동등한 ‘뮤지션’이었다. 블루스 음악은 이들을 묶어준 연결고리였다. 이들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날실 삼고, 방랑 의식을 씨실로 삼아 이 한 장의 블루스 앨범을 짰다.


신중현이 쓴 「봄비」를 7분여 가량의 곡으로 재편곡하거나, (델타 블루스 장르 특유의) 보틀넥 기타 연주가 인상적인 (이정선이 만든) 「오늘 같은 밤」을 엄인호가 부르는, ‘자유’로 가득한 이 앨범은 (LP 기준으로) 공교롭게도 한영애가 부르고 엄인호가 만든 「그대 없는 거리」로 열고, 한영애가 부르고 엄인호가 만든 「바람인가?」로 문을 닫는다. 마음 가는 대로 연주하고 부르는 듯한 이 앨범은 결과적으로 블루스 음악에 대한 이들의 진지한 태도를 드러냈다.


이정선이 작곡한 연주곡 「Overnight Blue」는 LP에서는 A면의 마지막에 (CD에서는 맨 마지막에) 자리했다. 정석적인 블루스 연주로 가득한 이 연주곡은, 가요와 블루스를 결합한 엄인호의 곡과, 블루스의 ‘격정’을 ‘체화’하여 연주한 이정선의 곡과도 약간 성격을 달리 했다. (여담이지만, 나는 LP의 순서를 존중한다. 이 곡은 이정선이 만든 「한밤중에」의 고독과 느슨하게나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인호와 이정선은 또한 신곡과 더불어 그동안 자신들이 발표한 곡을 가져와 재녹음하여 이 앨범에 실었다. 이들이 재녹음한 곡은 이 앨범에서 비로소 본래 색과 의도를 일정 부분 되찾았다.


이정선의 기타 연주와 엄인호의 기타 연주가 이 앨범을 굳건한 사운드로 거듭나게 했지만, 김동성의 키보드 연주 또한 이 앨범의 사운드를 빛냈다. 「그대 없는 거리」의 간주에서 엄인호의 기타 연주와 함께 들리는 그의 키보드 연주와, 「봄비」, 「나그네의 옛이야기」을 넉넉히 채우는 그의 오르간 연주는 (결과적으로 ‘정제된 타협의 산물’로 수렴된) 이 앨범의 사운드가 결여한 생동감을 꽤 보충했다. 작곡가이자 주요 세션으로 앨범에 참여한 윤명운 또한 자신의 블루스 하모니카 연주와 보틀넥 기타(Bottleneck Guitar) 연주를 이 앨범에 진하게 남겼다.


「봄비」와 「나그네의 옛이야기」를 맛깔나게 부르는 박인수의 보컬은 보컬리스트 박인수를 세상에 각인시켰으며, 「바람인가」와 「그대 없는 거리」를 부른 한영애와 「아쉬움」에서 엄인호와 더불어 노래한 정서용 또한 이 앨범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감을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렸다.


이 앨범은 바로 다음 해에 나올 2집에 비해서 조금 심심하게 들린다. 방랑인인 엄인호와 ‘학구적’인 이정선, ‘흘러간 가수’였던 박인수나, ‘신인’이었던 한영애와 정서용이 정태국, 김영진, 김동성, 강승용과 같은 세션과 더불어 (상하관계를 막론하고) 이 앨범을 녹음하는 와중에 처음으로 합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이 앨범은 결국 각자를 존중하는 배려, ‘블루스를 좋아한다’는 공통적인 관심, 자유롭고 헐거운 밴드의 성격을 모두 모은 앨범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심심한 사운드 속에서 이 앨범의 곡을 연주하는 (자기 할 일만큼은 정말이지 제대로 하는) 뮤지션들 사이에 도저히 메워지지 않을 (인간 근원적인) ‘간격’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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