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1987 추억 들국화』

PART 9. 47-40-68

by GIMIN

허성욱이 신디사이저로 ‘사노라면’의 멜로디를 연주한 「시작곡」을 주찬권의 파워풀한 드럼 연주가 확실히 끝내며 「북소리」를 연다. 허성욱 또한 「북소리」에서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청자에게 확실하게 들려줬다. (이 앨범의 CD 버전은 이 두 곡을 하나로 합쳤다.) 허성욱은 사뭇 성격이 다른 이 두 곡에서 자신의 출중한 연주 실력을 고르게 유지했다.


이 앨범의 모든 곡엔 허성욱의 건반 연주가 우뚝 서있다. 단순한 배킹 연주임에도 그의 건반 연주는 해당 곡의 정서를 다잡았다. 「사랑한 후에」의 기나긴 후주를 연주하는 허성욱의 건반 연주는 곡이 지닌 우수 어린 감정을 은은히 강조한다. (드보르작[Dvořák]의 교향곡 ‘신세계로부터’의 4악장을 여는 유명한 멜로디를 피아노로 연주하고, 스콧 맥킨지[Scott McKenzie]의 곡인 「San Francisco」(1967)*의 첫 소절 멜로디를 어쿠스틱 슬라이딩 기타와 신디사이저로 연주한) 독특한 악센트 활용과 (글리산도 주법을 비롯한) 여러 기법을 활용한 건반악기 연주가 곡의 다이내믹한 인트로를 만든 (허성욱 또한 보컬로 참여한) 「머리에 꽃을」은 이 앨범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떤...(가을)」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전인권의 묘한 보컬 또한 허성욱의 건반 연주가 제대로 서포트했다. (김정호가 만들고 불렀던 곡을 커버한) 「날이 갈수록」 역시 허성욱의 건반 연주가 곡의 정서를 책임졌다. 그 당시엔 구전민요였던 「사노라면...」의 첫머리 또한 허성욱의 느린 피아노 배킹 연주가 곡의 서글픔을 배가시켰다.


전인권은 (허성욱이 정지[整地]한 이 앨범의 사운드에 자신의 목소리를 맞추며,) 이 앨범에서 자기 곡과 남의 곡을 모두 소화해 부르는 괴력을 발휘했다. 「사노라면...」을 선곡한 그의 음악적 ‘센스’와, 원곡을 밀도 높은 감정으로 번역한 「사랑한 후에」의 완성도는, 그의 이러한 태도가 결코 상업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맴도는 얼굴」과 성격이 비슷한) 「여자」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몸의 한계로 표현한 「이유」를 작곡한 그의 창작력은 이 앨범이 다른 방면으로 이뤄진 ‘창작’ 앨범임을 천명했다.


들국화의 앨범에 이어 이 앨범의 드럼 세션을 맡은 주찬권은 자신의 파워풀한 드러밍을 다시 한 번 이 앨범에 실었다. 「이유」를 강타하는 드럼 연주도, 「어떤...(가을)」의 멜로디에 착 달라붙는 드럼 연주도 훌륭히 소화하며 그는 이 앨범의 사운드를 또 한 번 단단히 묶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 앨범에선 ‘베이스 세션’으로만 참여한 최성원은 절제된 베이스 연주로 이 앨범의 저음부 사운드를 확실히 챙겼다. 최구희가 연주한 「어떤...(가을)」의 리드 기타 사운드는 (함춘호의 리드 기타 연주와 더불어) 이 앨범의 사운드에 빛나는 재기를 또 한 번 부여했다.


『들국화』(1985)가 ‘들국화’란 밴드가 만든 가장 최선의 사운드가 담긴 작품이었다면, 이 앨범은 ‘들국화’라는 모임이 만든 가장 진취적인 사운드를 담은 앨범이었다. (이 앨범은 또한 『들국화』가 획득한 사운드보다 더욱 진일보한 사운드를 단편적으로나마 구현했다.) 때문에 이 앨범은 청자로 하여금 ‘들국화’라는 집단의 가능태를 상상하게 하고, ‘머리에 꽃을’ 다는 세계를 (이들이 상상했던 것과 마찬가지 자세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앨범의 상상 또한 공상에 그쳤듯, 이 앨범이 핀 ‘들국화’의 가능태 또한 가능성의 영역에만 그쳤다. 기념사진 한 장 가볍게 찍는 느낌으로 만들어진 이 앨범은 결국 한 밴드의 마지막 꿈으로 굳어졌다.



102.jpg

* 이 곡의 부제는 (이 곡의 가사이기도 한)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꼭 머리에 꽃을 다세요)다. 이 앨범의 「머리에 꽃을」과 아주 무관하지 않은 구(句)다.

이전 10화『SEOTAIJI AND BOYS I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