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푹푹 내리는 궂은 날씨에『임꺽정』6권과 루이스 글릭의 시집 두 권을 사겠다고 평택에 갔다. 서울역에서 1호선을 갈아탔지만, 가는 길이 너무 멀다 싶어 급행을 타려고 신도림역에서 내렸다. 날이 날인지라 차량은 움직이지 않고 급행열차는 너무 멀리서 오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바로 오는 차를 탔다.
군포역에 이르러 차문이 열리고 오랫동안 찬바람이 이는 걸 견딜 수가 없어서 거기서 내렸다. 중고서점에 있는 책은 금세 동나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있었지만, 아침까지 굶은 몸은 추위에 더할 나위 없이 약했다.
열차가 오기 전에 잠시 계단을 올라갔다. 개찰구 옆에 교통카드 충전기가 보였다. 모자란 교통비를 충전했다. 지갑 안에 든 유일한 지폐인 5,000원을 집어넣고 1,000원을 충전했다. 거스름돈 지폐 받는 곳이 은행 ATM처럼 생겼다. 플라스틱 뚜껑이 열리자 구겨진 지폐와 가지런한 지폐가 나왔다. 열차 도착하는 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렸다. 나는 얼른 안에 든 돈을 다 꺼내 주머니에 넣고, 다시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급행열차는 오지 않았다. 수원행 열차가 왔다. 수원역에서 다시 타자고 생각하며 나는 그 열차를 집어탔다. 화서역은 눈 쌓인 나무가 아름다웠다. 각 플랫폼마다 높이도 자재도 다른 수원역은 흐린 날인지라 어둑어둑했다. 급행열차가 오길 바랐건만 아직도 오지 않았다. 마냥 기다리기도 뭣해서 나는 서동탄역 가는 열차를 타고 병점역까지 갔다.
병점역에 내리니 찬바람이 더 심해졌다. 급행열차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내내 나는 군포역에서 참고 탔으면 지금쯤 도착했을 거라고 후회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결국 바로 오는 열차를 타고 평택역까지 가기로 결심했다.
오산역에서 핸드폰으로 폭설 뉴스를 보았을 때 느낀 초조함이, 펼쳐진 논밭을 바라보면서 심란함으로 바뀌었다. 논밭은 평택지제역까지 끝을 몰랐다. 초조함이 아름다운 풍경보다 풍경의 광활함과 막연함만 강조하는 것 같았다.
평택역에 처음 내렸을 때 느낀 초조함이 찬바람에 실려 광장 쪽으로 내달렸다. 나는 그 속도에 뒤쳐질세라 얼른 잰걸음 쳤다. 유명하다는 국밥집도 지나쳤다. 서점은 계단을 올라가야 있었고, 거기서 발견한 서점에 나는 잠시 김 서린 안경을 닦아내야 했다.
다시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잠시 방향을 잃고 광장을 헤맸다. 허둥지둥한 마음이 익숙하지 않은 지형과 충돌하면서, 나는 갑자기 아무런 정보도 없이 여기에 바로 내린 것 같았다. 한참을 헤매다가 건너왔던 횡단보도를 발견했을 때, 나는 우물에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리다 마침내 드리워진 사다리를 발견한 사람처럼 기뻤다.
들고 있던 세 권의 책을 가방에 넣은 채로 열차를 탔다. 열차 의자에 추운 몸을 녹였다. 추수는 진작에 끝난 누런 논밭 사이로 다시 눈이 내렸다. 금정역에 내렸을 때, 눈 때문에 4호선 열차는 20분 뒤에나 온다고 안내방송이 나왔다. 사람들은 열차가 올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햇살에 입김을 보탰다.
열차는 그보다 늦게 도착했다. 나는 이쑤시개처럼 꽂힌 사람들 사이에 서서 한 시간을 더 가야만 했다. 네다섯 시간이면 충분했을 여정은 폭설로 인해 여덟 시간 반에 가까운 대장정으로 마무리되었다.
집에 와서 주머니를 뒤졌다. 1,000원짜리 지폐 다섯 장이 주머니에서 나왔다. 분명히 1,000원을 충전했을 텐데 왜 5,000원이 그대로 남은 걸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충전기를 떠올렸다. 지폐 네 장과 더불어 구겨진 지폐가 한 장 더 튀어나온 것을 나는 미처 세보지도 않고 몽땅 집었던 것이다.(2024.8.19)